정림건축 디자인위원회 대담: 들어가며
중대형급 이상의 건축사무소는 자본 논리로 구축되는 사업성과, 사용자와 도시를 대하는 공공 이데올로기 사이에서 그 균형을 찾기 마련이다. 건축주의 요구를 충실히 이행하는 동시에 건물이 지닌 사회적 가치와 공공적 자산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은, 정림건축이라는 ‘집단’이 창설된 초창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 고민해온 지점이기도 하다. 공공성이란 건축과 도시 환경을 일구는 이들이라면 기본적으로 갖추게 되는 태도이나, 거친 아이디어일지언정 이를 끝내 구현해내는 일, 나아가 한 사무소의 특성이라 손꼽을 수 있을 만큼 포트폴리오가 쌓이는 일은 또 다른 차원이다.
생각공장 프로젝트를 필두로, 정림건축 디자인위원회에게 ‘공공성’에 대해 물었다. 정림건축이 생각하는 공공성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으며 어떤 방식으로 구현되어왔는지, 현대 한국 건축에서 (그리고 실무에서) 공공성이라는 화두는 어떻게 인식될 수 있을지를 들어보았다.
참석. 기현철, 김경훈, 김동관, 김유나, 박재완, 이명진, 이호, 홍성현
진행. 장혜인
정리. 윤솔희
공공성이란 무엇인가
장혜인
시간을 마련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는 한국 현대 건축 계보에서 공공성은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 당산동 생각공장을 비롯한 정림건축의 프로젝트에서는 이 공공성이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를 말씀 들어보고자 합니다. 먼저 어떤 프로젝트부터 이야기해볼까요?
기현철
공공기관에서 발주한 프로젝트 외에 상업시설부터 보면 좋겠습니다. 하남 스타필드, 영등포 타임스퀘어에서 공공성은 무엇이었을까요? 이 두 프로젝트는 은연 중에 정림건축의 대표작으로 자주 거론되지요. 규모가 커서, 유명한 클라이언트라서 그럴 수도 있지만 저는 좀 다른 생각이 있습니다. 저희 집이 스타필드 고양과 가까이 있어 자주 방문하는데요. 그곳에 갈 때마다 쇼핑객뿐만 아니라 만보기를 차고 걷는 어르신, 뛰어다니는 어린이,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반려가족들을 봅니다. 다양한 이들이 어울려 각자의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지요. 어쩌면 이러한 풍경이 공공성을 이해하는 실마리가 되지 않을까요? 저는 공공성이란 유료와 무료, 소유의 개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개인 차원에서 가질 수 없는 것을 여럿이 향유할 수 있는 상태라고도 봅니다.
김동관
저도 스타필드에 자주 가는데요. 마당, 공원의 위치와 규모, 공용공간의 폭 등이 적절해 계속 머무르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고요. 저녁 때 가보면 정말 좋아요. 그 모습을 보면서 반드시 공공기관의 프로젝트여야 공공성을 구현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느꼈어요. 이 맥락에서 저는 정림건축 앞 상공회의소 건물도 정말 좋아합니다. 준공한지 벌써 20년이 넘었을 텐데 여전히 1층 로비는 쾌적하고 남대문과의 버퍼 영역이 잘 설정돼 어색함이 없어요. 재료 선택이나 야외 공간 배치 등은 지금 봐도 촌스럽지 않고 아름답죠.
김경훈
해묵은 주제인데도 공공성은 여전히 뜨거운 주제죠. (웃음) 시대에 따라 공공성을 보는 관점이 달라져 왔기 때문일 텐데요. 스타필드를 바라보는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그곳의 넓은 복도와 큰 보이드를 공공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보다는 수용인원이 많아야 하니까, 더 많은 사람들이 머물러야 하니까 더 크고 넓게 짓는 데에 목적이 있었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경험의 질을 우선시하는 요즘 트렌드와 공공성이 맞닿은 사례이죠. 하지만 그 틈에서 배울 건 분명히 있습니다. ‘일반 근린생활시설에서 상업성과 공공성을 어떻게 연결 지을 수 있을까? 관리 주체가 명확한 대형 상업시설과 달리 관리 주체가 불분명한 중소형 상업시설에서 지속 가능한 공공성이란 무엇일까? 어떤 의미로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같은 이상을 위해 다른 건축물이 처한 상황과 클라이언트의 관점을 복합적으로 분석하면서 말이에요.
박재완
이런 생각도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공공성이란 가치를 과잉 소비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일례로 프랑스 유학 시절 도시계획 시간에 과제를 발표하며 ‘세미-퍼블릭 스페이스’를 언급한 적이 있어요. 그랬더니 교수님이 “세미-퍼블릭이 뭐죠? 한국에는 그런 게 있나요?”라고 되묻더군요. 그것의 운영 주체, 관리 주체는 누구냐고 물으면서요. 정림건축 포트폴리오를 보면 프로젝트 둘에 한 번 꼴로 세미-퍼블릭 스페이스가 등장합니다. 그만큼 관대하죠. 그래서 저는 우리가 사용하는 공공성을 조금 더 냉정하게, 더 강하게 말하면 의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상업성을 효과적으로 보완하는 요소로서 공공성이란 말을 붙이는 건 아닌지, 공공성 추구가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기에 상위에 올려둔 건 아닌지. 우리의 방향성을 점검하는 과정이 필요하죠.

김유나
정림건축이 생각하는 공공성이란 무엇인지 솔직하게 직시할 필요가 있다는 말씀에 공감해요. 장소만들기(placemaking)에 기반해 커뮤니티 형성을 지원하는 뉴욕 비영리단체 ‘공공공간을 위한 프로젝트(Project for Public Spaces)’는 공공성을 만드는 10가지 요소를 <파워 오브 텐(The Power of 10+)>이란 제목으로 정리했어요. 앉을 수 있는 곳, 뛰어놀 수 있는 놀이터, 만질 수 있는 예술, 들을 수 있는 음악, 먹을 수 있는 음식, 경험할 수 있는 역사, 만날 수 있는 사람 등이 포함되죠. 저는 공공성이란 사람들 사이에서 공유되는 경험이고, 건축가의 역할은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모일 수 있을지를 디자인하는 일이라고 봐요. 그러니 공공성을 만드는 데 정량적인 법적 근거, 예컨대 ‘5%의 공개공지를 만든다’가 절대 목표가 아니라 그 공개공지에서 어떤 사람들이 무슨 활동을 할 수 있는지를 그려내고 제안하는 게 중요하단 거죠. 또 대중과의 커뮤니케이션 측면도 고려해야 해요. 예를 들면 미국에는 공개공지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웹사이트가 있어요. 위치, 운영주체, 관리자 정보 열람뿐만 아니라 문의접수도 하죠. 우리나라 일반 대중은 공개공지란 개념도 낯설어하는 게 현실이에요.
홍성현
한국 현대 건축에서 광장은 실제 공공성을 위한 제안이기보다는, 말씀하신 것처럼 실무에서 인허가를 통과하기 위한 법적 도구에 가까웠죠. 그렇다면 이러한 현실 또한 한국 현대 건축의 조건과 언어로 해석해야 하지 않을지요.
기현철
우리 정서에 맞는 공공공간 유형 개발 역시 활발하게 일어나야 한다고 봅니다. 서구권의 광장, 플라자를 공공성의 공간화 모델로 참조하면서 두레마당, 어울림 마당 등을 만들고 있지만 이들은 사실 활용도가 굉장히 낮거든요.
김유나
동시에 법규 보완도 필요할 테고요. 현행 제도는 경관적인 측면에서만 성과를 요구하고 있거든요. 앞으로는 현대 건축에서 공공성을 확보할 때 어떤 고민과 제안이 따라야 하는지 지침이 필요할 것 같아요.
박재완
서울 마곡지구에 신축 건물이 늘어나며 공개공지가 많이 생겨났지만, 이용 면에서는 아직 미지수예요. 공공성을 위한 공공공간은 그저 만드는 것만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누구를 위해’ 등의 단서를 구체화하는 과정이 설계 단계에서부터 이뤄져야 해요.
김유나
그런 면에서 당산동 생각공장의 선큰 광장이 매우 인상적이었어요. 앞으로 생각공장 입주자들이, 일대의 주민들이 이곳에서 어떤 일을 펼칠까 궁금해질 정도로 구체적인 공공성이었어요.
이명진
지식산업센터란 유형은 쉽게 말해 ‘신식’이죠. 요즘 생긴 프로그램이잖아요. 도심 활성화를 위해 도입된 개념인데 분양이란 1차적 목표가 있다 보니 대개 규격화, 표준화에 맞춰져 있어요. 당산동 생각공장의 선큰 광장은 그 틈에서 탄생한 공공성이라 더욱 재미있는 것 같아요. 상업적 가치를 충족하면서도 공공성을 입체적으로 해결한 건축적 해법이 돋보이죠.


정림건축은 공공성을 어떻게 만드는가
이명진
저는 공공성이란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특별한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같은 장소에 같은 기억을 가진 이들이 공동체이고 건축가는 그 과정에 기여해야 한다고 봐요. 상업시설 설계에는 특수한 목적, 그러니까 재화 판매를 위한 로직이 존재해요. ‘시계는 가린다’, ‘재화와 복도 사이 거리는 이 정도가 적당하다’, ‘고개를 들었을 때 위층 상점 간판이 보여야 한다’ 등의 기본 지침들이 철저하게 상거래에 맞춰져 있죠. 공공적 이벤트 역시 결과적으로 장사가 잘 되게 하려는 목적을 기저에 깔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거예요. 다만 가치 소비, 경험 소비라는 현대 트렌드가 맞물리면서 상업시설을 짓는 건축주들도 사람들이 편안하게 머물 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건축적 노력을 하고 있다고 봐요. 결국 건축가는 상업의 논리, 개인(클라이언트)의 니즈 등 어느 한 쪽 입장에 편중되지 않고 공공의 안녕과 행복, 도시적 맥락, 나아가 역사성과 시간성까지 더해 시공간적 가치를 버무려 주는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바로 그곳에 정림건축이 해야 할 일, 그리고 공공성에 대한 태도가 있다고 봅니다.
김영훈
공동주택 설계나 복합 단지 설계에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대중의 안목은 높아졌고, 문화를 사고 파는 것이 트렌드이잖아요. 누구나 자신의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려고 노력하죠. 도면 앞에서 우리는 가치 있는 시간을 만들어줄 공간이란 과연 무엇인지 계속 고민하며 그려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명진
공공성을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개발사의 시각과 자세도 중요해요. 일본 모리 빌딩의 경우 프로젝트 기간이 20~30년 가량 된다고 합니다. 일본 정부와 개발사, 설계사 등이 주민 또는 상권협의회와 만나는 횟수는 1천 번이 넘어간다는군요. 이 지역을 어떻게 개발할지, 상생하는 방안은 무엇일지 긴 시간 동안 자주, 테이블에서 함께 논의하는 것이지요. 본질적으로 운영이 잘 되는, 지속 가능한 공공성은 이 시간에서 탄생한다고 봅니다.

김경훈
750개의 개인 상가들이 밀집한 김포 라베니체 프로젝트에서 정림건축이 만드는 공공성은 대지로의 접근성을 높이는 과정에서 발현되었다고 봐요. 오래 방치된 땅을 매입한 클라이언트는 이번 투자로 일대의 활기를 만들겠다는 의지가 분명했는데 문제는 지구단위계획상 대지와 도시가 연결될 수 없다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어요. 이 과정에서 정림건축은 역으로 김포시에 지구단위계획 수정을 요청하면서 공공과 민간 모두 윈윈할 수 있는 디자인을 제안했어요. 양측의 이견을 설득과 합의로 봉합하면서요. 저는 이 과정을 통해 우리가 만드는 공공성이란 공공이 참여할 수 있는, 그러니까 공공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드는 데에 있음을 느꼈어요. 건축가라면 클라이언트의 의지로 구현 가능한 공공성에만 만족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김영훈
파라스파라 프로젝트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군요. 2012년 북한산 국립공원 내에 짓는 유일한 리조트로 설계에 착수했는데 프로젝트 도중 인허가 특혜 시비에 휘말려 8년 동안 방치해야 했어요. 끝내 조선호텔앤리조트가 대지를 인수해 파라스파라 리조트로 구현했는데, 저희는 설계 단계에서 대척점을 이루는 요청들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아야 했어요. 서울시와 강북구청의 관심은 공공성 구현, 클라이언트의 관심은 사업성이었거든요. 이 팽팽한 줄다리기 속 장력을 견디며 건축물의 형태, 공공영역, 운영방식 등 다각도로 공공성을 메꿔 넣는 것이 저희의 일이었어요.

박재완
당산동 생각공장 저층부는 두 가지 레이어를 갖고 있어요. 지하 1층으로 향하는 선큰 광장은 업무시설로 향하는 사적인 레이어, 지상 1층은 도시의 길로 공적인 레이어죠. 그 사이의 균형이 이 땅의 전체적인 안정성을 만들어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당산동 생각공장을 보고 저는 공공성이 냉철한 관점에서 더욱 명확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땅을 비워 놓으면 아이들이 와서 놀겠지, 사람들이 머무르겠지’ 이런 생각은 공상에 그치기 쉽다는 것을요. 그런 부분에서 당산동 생각공장이 도심에 공공성을 자연스럽게 구현한 예시가 아닌가라고 생각해요.
이호
돌아보면 정림건축 디자인위원회 시간에 가장 자주 하는 말도 땅과의 관계인 것 같아요. 건축물의 배치, 땅을 쓰는 방식에서 주변과의 조화를 늘 추구하죠. 이게 정림건축이 공공성을 대하는 태도 같아요. 제가 이대서울병원 프로젝트 설계에 참여할 당시 증축 부지를 어디로 둘지가 첨예한 이슈였는데 정림건축은 단번에 결정했어요. “앞을 열어줘야 하지 않겠나?”라고요. 당산동 생각공장에서도 도시를 단절시킬 만한 거대한 매스를 요구 받았지만 그것을 쪼개고 나누고 연결해 도시의 길을 만든 셈이잖아요. ‘우리가 설계한 건물로 이 도시를 완결 짓지 않겠다, 앞으로의 변화에 순응하겠다’는 태도를 잘 드러내는 사례였다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