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안을 완성할 퍼즐을 찾아서

부산항 북항 마리나 설계팀 대담: 중간 설계

부산항 북항 마리나의 현상(계획) 설계안을 분석했을 때 특화 프로그램의 부재로 인해 운영 측면에서 대응하기 어렵다는 약점이 대두되었다. 이에 생활 밀착형 프로그램을 도입하여 부산 지역 시민들의 접근성을 높이고 해양 레저 문화를 기반으로 한 커뮤니티 형성과 이용 활성화를 꾀해야 한다는 시사점이 도출되었다.
일시. 2023년 8월 9일 14:15 – 15:15
참여. 박재완, 천지혜, 오정택, 오가영
진행. 장혜인

1. 추가 프로그램
2. 국외 마리나 답사 및 분석
3. 요트 파빌리온 계획
4. 모형 제작 과정
5. 주 52시간제, 서로 도우며 일하기
6. 마치며

추가 프로그램

천지혜

현상에 당선되고 중간 설계에 본격적으로 돌입하자마자 팀이 새롭게 구성되었어요. 이 때 중심 역할을 한 사람들이 (오)정택, (오)가영, (김)영빈이었고 여기에 (김)현삼 소장님까지 계셨죠. 일반 현상 설계는 보통 계획 설계(Schematic Design, SD)로 간주해요. 그래서 ‘SD 팩이 어느 정도 구성됐으니 이대로 DD(Design Development, 중간 설계) 진행하면 되겠구나’하며 행복하게 뚜껑을 열었는데…. 발주처에서 프로그램을 새로 추가하겠다시는 거예요. 무엇을 추가할지는 미정이었고, 추가할 프로그램의 타당성 여부까지 파악해야 하니 사업성 검토 용역도 들어간 셈이었어요.

장혜인

어떤 프로그램을 넣어야 할지도 팀에서 다 찾으신 거고요?

천지혜

발주처에서 먼저 세 가지를 알려줬어요. 생존 수영장, 스킨 스쿠버, 실내 서핑장. 이 중 실내 서핑장을 제외한 나머지로 가게 됐죠. 공공에서 발주하는 현상 설계는 공사비 기반으로 계약하다 보니 프로그램 변경 시 기존 대비 비용이 얼마큼 추가된다는 근거가 제시되어야 해요. 프로그램이 추가된 설계 대안 2개를 작성해 각각의 예상 소요 비용을 새로 산출해야 했어요.

박재완

즉, 프로그램 제안이 최종적으로 반영될지 미지수인 상태에서 우선 평면적으로 풀어야 했던 거죠. 이 대안들을 작성하느라 정택 님이 많이 고생했어요. 수영장이랑 스킨스쿠버 풀을 육상 적층 시설 뒤에 넣어 건축면적을 최소화하는 식으로 만들었었죠?

오정택

네. 그러면서 수영장과 스쿠버 풀을 위아래로 쌓았죠. 개인적으로 저는 프로그램이 추가되는 게 오히려 좋았어요. 사실 프로젝트를 하면서 스스로에게 즐거움이나 보람을 찾아주려고 노력하고 있었거든요. 추가 프로그램을 요구 받게 되자 ‘기회다’ 싶었죠. 현상안에 없었던 시설을 백지 상태에서 만드는 일이니 보다 신경 써서 작업했어요. 그리고 대안에 따른 견적을 산출하는 기간과 국외 답사 기간이 겹쳐서, 지혜 님과 이틀에 한 번 꼴로 연락하면서 견적을 맞춰 나갔고요.

천지혜

시차가 정반대로 나니까, (웃음) 사무실에서 오후에 작업한 양을 보내주면 우리는 아침에 확인해서 피드백 하는 식으로, 그렇게 진행했어요. 견적은 건축뿐만 아니라 구조나 설비 같은 타 분야에서도 받아야 하는데, 그런 취합 과정을 정택 님이 같이 도맡아서 해 줬죠.

국외 마리나 답사 및 분석

장혜인

자료를 보니 국외 답사는 규모가 꽤 컸던 것 같아요.

천지혜

발주처 분들을 모시고 정림건축, ING, 한국항만기술단 3사가 모두 참여했어요. BPA에서는 마리나 프로젝트 담당 실장님, 설계 관리 감독님, 마리나 운영 담당하시는 분이 합류하셨고요. 체류와 이동 기간을 포함해 9박 10일 동안 지구 반 바퀴를 돌면서 11개 마리나를 방문했습니다. 저희를 인솔하기 위해 답사지마다 계류 시설 담당자, 마리나 운영 담당자, 심지어는 마리나 회장님이 나오시기도 해서 운영 면에서 여러 주체와 역할이 있다는 걸 실감하기도 했어요.

장혜인

가셔서는 무얼 조사하고자 했는지.

천지혜

인터뷰 질문지는 마리나 시설 설계와 운영 전략, 크게 두 축으로 준비했었어요. 시설 설계 관해서는 저희가 사전 조사를 주로 도맡았었고, 운영에 관해서는 BPA 담당자 분이 답사 시에 직접 조사하시는 걸로 하고요.

오정택

11개 답사지는 유명하지 않은 마리나가 다수였어요. 구글 어스에서 찾아보면 어느 외딴 마을에 만들어져 있거나 하기도 했어요. 리뷰 사진들은 동네 사람들이 직접 찍어 올린 것들이라, ‘이분들은 이렇게 작은 마리나를 이렇게도 쓰시는구나’하고 놀라웠던 동시에 현실적으로 와 닿았었어요.

천지혜

규모가 제일 작았던 두 곳 말이죠? 그러니 11개 답사지는 어디 대단히 저명한 시설로만 추린 것도 실은 아니었던 거예요. 마리나를 아시는 분들에게 ‘뭐든 좋으니 이름이라도 알려달라’며 받은 곳들도 있었거든요.

박재완

그리고 거길 가 보지 않았다면 보고서도 맥아리가 없었을 거예요.

장혜인

말씀하신 대로 사전 보고서와 결과 보고서, 두 가지가 작성되어 있어요. 분석이라고 하면 어떤 틀을 설정하느냐에서 출발해 객관적으로 설득되는 수치나 결과가 나와야 할 텐데요. 어떻게 작성하셨는지?

오정택

사전 보고서 양식은 개발기획본부에서 연구 용역으로 참여했던 ‘서울시 토지자원 활용 카드’를 참고해 제작했어요. 사이트 조사 단계에서 제작된 점이 동일했고, 평가 항목도 있었거든요. ‘분석 리포트’가 필요하다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니 과거 경험들 중에서 쓸 만한 걸 찾아온 결과였어요.

천지혜

그래서 일반적으로 작성하는 건축 답사지의 틀과는 또 달랐어요. 해역과 수역의 범위, 해역 시설 대비 상부 시설의 비율 등의 고민들이 있었고요. 비화가 있는데, 당시 한 타이어 회사 광고 중에 육각형 레이더 차트를 이용한 장면이 있었어요. 타이어 별로 강점이나 균형점을 설명하면서요. 그 차트를 보고서에 활용했어요.

장혜인

영감을 얻으신 거군요.

천지혜

이 6가지 팩터가 재미있는데요, 마리나 설계에 필요한 기본 요소들이면서도 우리 사이트 상황에 적극적으로 참고할 만한 기준들이기도 해요. 북항 마리나는 부산역에서 가까우니까 접근성을 알아보아야 했고, 고가의 선박과 요트를 다루는 마리나를 공공이 즐기려면 이용 측면의 개방성도 알아볼 필요가 있었고요. 생존 수영장과 스킨스쿠버 풀 등의 특화 프로그램을 고려 중이었는데 다른 마리나에도 이러한 플러스 알파 개념의 시설이 있는지, 있다면 어떻게 운영하는지도 조사하고자 했죠. 이외에도 기본 시설 규모는 얼마나 되는지, 기능 시설은 이용하기에 편리한지, 클럽하우스나 식당과 숙박 등 지원 시설은 다양한지 등을 기준으로 삼았어요. 이러한 지표들을 만들어 저희 나름대로 점수를 매겨본 것이죠.

오가영

차트를 쓰면서도 반신반의 하긴 했어요. 건축에서는 이런 식의 분석을 잘 안 쓰잖아요. 11곳을 답사한 결과로 설계안의 타당성을 뒷받침할 데이터가 잘 나와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면 어쩌나 하고요.

오정택

사실 이 차트를 만들기 전까지는, 저도 가영도 ‘이게 될까? 뭐가 나오나?’ 그런데 작성을 마치는 순간,

오가영, 오정택

(동시에) 규모 순으로 정렬하면 나오겠다. 이거 되겠다.

천지혜

다녀와서 모아보니 굉장히 재밌더라고요. 시설 규모 순으로 나열해 보니 제일 작은 네덜란드 마리나(WSV DE Spiegel)와 제일 큰 모나코 마리나(Yacht Club de Monaco), 두 곳의 유사점이 눈에 들어왔어요. 특화 프로그램이 경쟁력을 크게 갖추고 있고, 기능 시설 편의성이 높죠. 무엇보다 주목했던 건 두 마리나 모두 본인들의 특화 프로그램을 설명할 때 ‘삶에 깊이 관여하는 마리나, 삶의 한 요소로서 요트 문화’를 공통으로 강조하던 모습이었어요.

조사한 국외 마리나 사례 중 기본 시설 규모가 가장 작은 네덜란드 WSV de Spiegel Marina ⓒ WSV de Spiegel Marina

박재완

네덜란드 WSV DE Spiegel은 완전한 지역 밀착형 마리나예요. 공공이 운영하는 소규모 마리나로서 요트 문화를 기반으로 한 교육이나 축제 등 여러 방면으로 지역 커뮤니티 결속에 일정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어요. 인터뷰 시작 전 마을 당구장 사장님께서 일단 앉아서 술부터 들라고 하셨는데, 털털한 농부 아저씨의 환대를 받는 기분이었달까요. (웃음) 사장님은 ‘지역에 맞는 마리나’를 가지도록 제언하셨어요. 한편 모나코 Yacht Club de Monaco는 초호화 대형 선박을 다루는 리조트형 마리나로 클럽의 회장님을 인터뷰할 수 있었는데, 마리나란 “류 드 비(Lieue de vie)”, 즉 ‘삶의 장’이라는 말씀을 들었어요. “보트와 선박만 정착시켜주는 마리나는 생활과 단절된 것이다. 세계 최정상급 마리나로서 우리가 가장 주의를 기울이는 일은 지역 주민과 어린이들에게 카누와 요트를 제공하는 것”이라고요. 그러면 지역 관련된 미팅도 수행하느냐고 재차 묻자 “그게 없으면 마리나가 아니다”라고 강조했고요.

조사한 국외 마리나 사례 중 기본 시설 규모가 가장 큰 모나코 Yacht Club de Monaco ⓒ Yacht Club de Monaco

천지혜

사전 분석 자료와 답사에서 나온 화두를 취합하자 완전히 다른 성격과 위치에서 접점이 생긴 거죠. 가영 님과 정택 님이 꼼꼼히 리서치 해준 덕에 나중에 결론 내기도 좀 더 쉬웠어요.

오가영

국외 답사를 통해 ‘생활형 마리나는 규모에 관계없이 그 지역에서 시민들의 생활에 밀접하게 관련이 있고 중요하다’는 분석을 도출했고, 북항 마리나에 이 분석 결과를 대입해 보니 ‘시민들이 잘 사용할 수 있는 프로그램 도입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그에 따라 추가 프로그램으로 고려하고 있던 생존 수영장과 스킨 스쿠버 풀을 설계안에 매끄럽게 안착시킬 수 있게 되었어요. 결론이 들어맞는 순간 굉장히 신기했고, 또 좋았어요.

박재완

추가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타당성을 보고서에서 해소할 수 있어 다행이었어요. 프로젝트를 진행하다 보면 객관적인 분석이나 논리가 한 부분 적절히 뒷받침해 줘야 해요. 현상 설계 때는 “해안선 1%”라는 숫자가, 중간 설계에서는 답사 보고서들이 한몫했던 거죠. 든든한 기분이었어요.

천지혜

이건 정말 정택 님과 가영 님의 날선 분석이 명료하게 맞아떨어진 덕분이에요.

요트 파빌리온 계획

요트 파빌리온 스케치

박재완

가영, 계획안에 했던 수변 카페 설계도 이야기해 줘요.

오가영

지혜 님이 수변 카페를 파빌리온 형태로 계획해 보라고 하셔서 맡게 되었었어요. 그때 저는 정말 햇병아리 신입사원이어서 얼추 뭔가 해 보겠다며 가져는 갔는데, 말을 정말 못했거든요. 지혜 님께서 “계획안을 설득할 때는 프로그램 분석, 계획안의 당위 등을 설명해야 된다”고 조곤조곤 알려주셔서, 어린 마음에 그날 잠 못 이루고. (멋쩍은 웃음) 마음을 다잡고 요트 교육 과정을 꼼꼼하게 스터디해서, 그다음 회의에서는 요트 교육에 필요한 공간들을 설명 드리고, 설계에 필요한 사항들을 차근차근 말씀드릴 수 있었어요. 그런 뒤 재완 님이 디자인을 한 번 잡아 주셨는데, 편형한 매스로 다듬어졌던 것이 기억나요.

천지혜

수변 카페 사이트를 평지로 알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미묘한 레벨 차가 있었던 대지였어요. 건너편 오페라하우스에서 카페를 바라볼 때 더 낮은 눈높이에서 보여야 했는데 처음에 대지 모형을 맡았던 친구가 그 레벨 차를 못 맞추고 어려워했겠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됐죠. 가영에게 보였더니 다시 만들어야겠다고 해서, 그 부분 콘타만 처음부터 다시 만들었어요. 레벨 계획서부터 전부 다시 떠서요.

오정택

맞아요. 전체 모형에서 그 부분만 잘라 내고, 가영 님이 새로 만든 부분을 끼워 넣었었죠.

박재완

여기 파빌리온의 녹화된 지붕이 오페라하우스에서 보이도록, 그래서 오페라하우스가 갖는 경관에 지장이 없도록 높이를 최대한 낮추어 계획안을 디벨롭했죠. 그래서 파빌리온 형상 자체가 어디에서든 잘 보이도록 의도했어요. 현장에 와서는 주변에 배기탑이 들어서면서 아쉽게 됐지만요.

오가영

그래도 저는 수변 카페가 들어서는 이 알맹이 땅이 우리 설계 범위 안에 같이 묶여 있었다는 사실이 좋았고, 재미있었어요. 마리나를 계획하면서 마리나에서 바라보는 오페라하우스를 생각했었지만, 반대로 오페라하우스에서 보는 마리나도 생각할 수 있겠죠. 이 수변 카페는 오페라하우스와 가깝지만, 마리나와 같은 어휘를 가지는 한 쌍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또 다른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을까 생각해요. 작으나마 별도의 대지에서 이를 염두하며 계획하는 일은 또 다르니까요. 마리나를 가장 멋진 곳에서 바라볼 수 있는 장소라고 생각해요.

요트 파빌리온 투시도
요트 파빌리온은 마리나 클럽하우스 건물과 오페라하우스를 연계하는 디자인 및 프로그램으로 계획되었다.

모형 제작 과정

장혜인

프로젝트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가 모형인데요. 중간 설계 단계에서는 언제쯤 제작되었나요?

오가영

도중에도 스터디용으로 많이 만들었었고, 마지막 모형은 중간 보고 준비하면서 만들었었어요. 당시 설계1본부는 무조건 모형을 만들어야 했는데, 특히 (김)동관 님과 재완 님 팀이 모형으로 유명했어요. (웃음)

박재완

지금은 회사에서 모형을 잘 안 만드는 분위기가 됐지만요. 마지막 모형은 여기 가영 님과, 지금은 퇴사한 김부빈 님이 만든 모형이었어요. 그동안 수많은 모형을 만들어오긴 했지만 ‘왜 만드는지’ 절절하게 느끼기로 손에 꼽는 순간이었어요. 건물이 이렇게 큰 줄 그때 처음 실감했고, 디테일 이전에 공간에 부여하는 성격이나 필요한 상세 계획들이 비어 있었음을 겨우 알았던 거죠. 중요한 역할을 해준 모형이에요.

천지혜

제작하기 전에 축척을 정하잖아요. 우리 건물은 양 옆으로 길다 보니 기왕이면 크기가 좀 컸으면 좋겠다고 요청했거든요. 그럼 A1 종이 규격으로 제작해도 594×841mm인데,

오가영

그랬더니 건물이 반으로 잘리고 있었죠.

천지혜

그래서 거의 A0 크기까지 갔어요. 가영 님이 캐드 화면을 촥 펼치는데… 속으로는 ‘헉’하고 놀랐지만 짐짓 의연하게 “그래. 가영아. 좋다. 이렇게 가자.” (일동 웃음) 규모만큼 하중도 꽤나 나가는데 모형을 고정할 만한 판도 마땅히 없었어요. 둘러보니 900×1800mm 크기의 회의실 탁자 하나가 남길래, 설계1본부장이었던 전상우 님께 ‘테이블 하나쯤 없어도 되죠?’ 하면서 양해를 구하고, 정택이 드라이버를 들고 와 테이블 나사들을 하나씩 풀었죠.

박재완

평소처럼 우드락으로 바닥을 만들기엔 모형이 여간 무겁지 않았으니까요. 테이블에 색지 바르고 그냥 붙여버렸죠.

천지혜

디테일 수준만 놓고 보면 사실 중간 보고용 모형은 이렇게까지 만들지 않아도 돼요. 다만 우리가 공간감을 실감하면서 도면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스터디가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 내부도 다 확인할 수 있도록 만들다 보니까요. 가영은 특히 공간을 다 이해하고 모형을 만드는 친구라 도움이 정말 많이 됐어요.

박재완

모형은 뚜껑을 열고 닫듯이 조립과 분리가 가능했어요. 그렇게 만들려면 수평으로 건물을 어떻게 층층이 나눌지도 계획이 필요하고, 실내 마감재까지 입혀야 하니 작업 난이도가 굉장히 높아지거든요.

오가영

3D 모델링에서 볼 때와 육안으로 물리적인 공간을 체험할 때가 다르잖아요. 완성된 모형은 보통 겉모습만 쉬이 둘러보고 말지만, 만드는 입장에서는 속속들이 공간감을 느끼게 돼요. 모형 작업에서 재미를 느끼는 부분이에요.

오정택

그 가치가 있는 거죠. 건축가 알바로 시자를 다룬 『엘 크로키』중 스페인 판티코사(Panticosa)에 지은 스포츠 센터 모형 사진을 표지에 크게 넣은 권호가 있어요. 예전에는 ‘모형을 뭘 이렇게까지 만든담’ 했는데, ‘이 정도로 고민을 많이 한다’는 어떤 선언이었겠더라고요.

주 52시간제, 서로 도우며 일하기

오정택

그러면서 저는 항상 자신 있게 말하는 게, 이만큼 해내면서도 주 52시간제는 지켜냈다는 거예요.

천지혜

지켰나요?

오정택

네. 한 98% 지켰던 것 같습니다. 그것도 저는 가치를 높게 사고 싶어요.

박재완

다들 밀도 있게 일했죠.

오가영

그때 팀원들 스케줄 관리가 굉장히 잘됐었어요. 모형 제작 기간도 거의 한 달이었는데 그것만을 위한 일정표가 따로 있었을 정도였어요. A3로 출력된 일정표에 모형 크기 정하기, 다음 날 목업해 보기, 레이저 작업에 필요한 일들 사전에 준비하기, … 일련의 단계들을 재완 님이 매일 확인해 주셨어요. “오늘은 어디까지 했니? 1층 했니?” (일동 웃음) 모형 제작도 그 정도로 촘촘하게 관리해 주셨으니 가능했던 거예요.

박재완

모형이 크면 클수록, 자칫 했다간 기한 내에 못 만들거든요.

천지혜

그걸 포함해서 팀원들 모두에게서 ‘시간 안에 잘 해보자’는 몰입을 느꼈어요. 이 친구들 화장실은 대체 언제 다녀오나 싶을 만큼 대부분의 시간을 계속 앉아서 작업하더라고요.

오가영

그러다가 누가 슬쩍 다가와서 기둥 썰어 주고 가시고. (웃음) 정택 님이었던가요? 톱으로 기둥 썰어 주시고, 사포도 갈아 주고.

천지혜

그랬죠, 오며가며 잘라 주고 가고. (웃음)

오정택

그러니까 그런 게 좋았어요. 누구든 하루 일과가 조금 일찍 끝나거나 하면 주변을 한번 돌아보았던 것 같아요. 바쁜 친구가 있으면 이렇게 가서, 도와주는 척 수다 떨면서 방해도 살짝 하고. (웃음)

마치며

장혜인

마치면서 팀원 분들의 소회를 들어볼게요. 가영 님부터 말씀해 주시면.

오가영

저는 기룡 님 바톤 이어받고 중간 설계부터 투입된 멤버였는데, 다들 ‘어벤져스’라 부르고 싶을 만큼 팀워크가 잘 맞았던 사람들이었어요. 영빈 님도 정택 님도 너무 잘하시는 분들이라 부담되기도 했는데 스스로가 가능한 역할에서 최선을 다 하자는 태도로 임했었어요. 모형이 그 중 하나였고요. 학부생 때도 모형 제작은 워낙 좋아했었고 그래서 잘 만드는 법도 나름 터득했었으니까, 그걸로 팀에 도움이 되었지 않았나 해요.

천지혜

가영이 당시 2년 차였죠? 우리 건물이 만만찮은 복합시설인데, 저연차였음에도 어려운 프로그램과 어려운 건물을 잘 이해하고 소화해준 덕분이에요. 모형뿐만 아니라 파빌리온 계획이나 답사 보고서 작성까지 폭넓게 활동해 주었으니까요. 프로젝트 진행 자체를 풍부하게 해 준 키맨이었어요.

오정택

저는 14년도 신입사원이니까, 4년 차 정도 되었을 때인데요. 현상 설계 평면을 마리나 프로젝트에서 처음 맡게 되었는데 심지어 프로그램도 다양했었어요. 그렇다 보니 아직 접해 보지 못한 종류의 도면도 있었던 거예요. 호텔 그리는 오정택, 레스토랑 그리는 오정택, 예식장 그리는 오정택이 한 명씩 필요했고… 그 당시 팀의 목표도 ‘중간 도면 그대로 상세 도면 작성이 가능한 수준’을 만들어 보자는 것이었어요. 도면에 정보란 정보는 정말 있는 대로 다 넣었던 것 같아요. 표현한 적은 없지만 새로운 일에서 잘 모르는 부분도, 능력 밖의 일도 많았던 과정이었어요. 그럼에도 태연히 일을 잘해낼 수 있도록 스스로 공부한 적도 많았고요. 다양한 프로그램을 알 수 있어 재미있었지만, 한편으로 일에만 너무 파고들었던 건 아닌가 해요. 지나고 나니 위아래 사람들을 많이 살피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더라고요. 제 역량이 더 좋았다면 가영 같은 팀원들이나 소장님들과도 더 많이 이야기 나누며 재미있게 갈 수 있었을 텐데, 그런 부분을 많이 챙기지 못했다는 생각이 커요.

오가영

그래도 정택 님이 우리 팀의 분위기 메이커였는걸요. 질문도 다 받아주셨는데, 그냥 알려주시는 게 아니라 이 도면을 왜 그려야 하는지부터 차근차근 다 설명해주셨어요. 저희 다들 정택 님에게 많이 배워서 이만큼 계획할 수 있었던 건데요.

오정택

음, 그랬나요. (웃음)

천지혜

너 참 잘 가르쳐. 나중에 가영 같은 제자들을 협력사로 만나. (웃음)

정림 피플앤웍스 시리즈 『N.2 부산항 북항 마리나』에서 발췌

천지혜. 2008년 정림건축에 입사했다. 일산 요진 와이시티 복합개발, 리비아 트리폴리 워터프론트 개발, 영종하늘도시 오피스텔 신축설계, 용인 SK아카데미 마스터플랜 및 리모델링에 참여 또는 진행 중이다. 부산항 북항 마리나 현상 설계, 본 설계 용역. 디자인 감리까지 TL(team leader)로 참여했다.
박재완. 프랑스 빠리-벨빌 국립건축학교에서 도시계획과 건축설계를 배우고 2007년 정림건축에 입사했다. 현대해상 하이비전센터, 아모레퍼시픽뷰티 제2사업장, SK기념관 등을 수행했으며 한국건축문화대상 대통령상(2017), 한국건축가협회 BEST 7 협회상(2017) 등을 수상했다. 부산항 북항 마리나 프로젝트에서는 현상 설계부터 현장 디자인 감리에 이르는 전 과정에 참여했으며, DP(design principal)로서 디자인과 기술적인 부분을 주로 담당했다.
오정택. 2014년 정림건축에 입사, 부산항 북항 마리나를 비롯해 SK기념관, 삼성전자 메가스토어 대전 본점 등을 수행했다. 부산항 북항 마리나 프로젝트 당시 현상 설계부터 중간 설계 마무리 단계까지 참여했다. 현재 플로르건축사사무소를 운영 중이다.
오가영. 2018년 정림건축에 입사해 SK하이닉스 이천 M16 설계용역, 부산항 북항 마리나, SK서비스에이스 이전사옥 인테리어 설계용역 등에 참여했으며 디자인 기획 업무를 거쳐 현재 빅테크 BU에서 근무 중이다. 부산항 북항 마리나 중간 설계 단계에 합류했다.

연관 정림포럼

연관 프로젝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