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여공간
공간
공간을 계획하고 요구된 프로그램을 채워 넣는다. 또는 프로그램을 적층하여 공간을 구성한다. 여러가지를 조합하고 분석해 가장 합리적인 설계안을 찾고 또 다시 검토하고 수정한다. 조금이라도 헛되이 버려지는 불필요한 공간이 없도록 각 공간의 의의와 가치를 되새겨 보고 공간의 경제적, 합리적 가치를 끌어올린다. 공간의 가치는 얼마나 온전히 기능을 담아내고 표출하느냐에 있다. 하지만 공간은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주변 공간과 관계를 맺으며 더 강렬하게 빛을 발한다. 공간은 예측 못할 미래의 시간과 무한한 가능성을 담고 있다. 이제 공간은 확장되고 먼저의 정의를 넘어선 그 이상의 가치와 새로운 가능성으로 변모한다. 어느새 잉여공간은 여백이 아닌, 단순히 그 가치를 높이는 조미료가 아닌, 공간 가치의 중심이자 주인공으로 바뀐다. 애초에 부여되지 않았던 이름과 가치, 그리고 헛것으로 비춰졌던 바로 그 공간이야말로 내재된 에너지의 근간이자, 충만한 건축적 가능성의 토대일지 모른다.
여행
쉬지 않고 걸어가며 끊임없이 주위를 둘러보며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한 경험을 가슴에 깊이 새긴다. 조금이라도 더 보고 조금이라도 더 체험하고 느껴보려 안달이다. 계속 걷는다. 다리가 너무 아프고 체력이 완전히 바닥나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때, 그제서야 잠시 나무에 기대 앉아 땀을 식히고 숨을 고른다. 아마도 미리 생각해 두었던, 뭔가 좋다고 소개받은 곳이 아닌 갑작스런 컨디션 저하에 따라 선택한 평범한 자리였으리라.... 일정에 없던 일탈이요, 기대치 않았던 방문이다. 새삼 여태 걸어오면서 익숙해진 풍경이 달리 보이고 변화의 속도도 다르게 느껴진다. 먼 풍경과 아주 아주 가까이에 있어 직접 만지고 느끼는 체험도 달리 와 닿는다. 빼곡하게 계획된 일정과 일정 사이를 채워주고 이어주는 장치는 또 다른 일정과 시도가 아닌 여백과 비움이고, 그 틈새를 통해 비로소 여행의 가치가 커지고 경험이 확장된다.
사람
웹툰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미생”에 많은이들이 열광한다. 이 드라마는 우리의 삶을 사실적으로 적나라하게 투영하고 있다. 신데렐라의 꿈같은 신분상승과 달달한 사랑 얘기를 통한 대리 만족도 없고, 상상 그 이상의 끝을 보여 주는 억지 설정의 막장 관계도 없다. 지금 이 척박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과 비애, 그리고 관계의 속살을 냉정하게 드러낸다. 차가운 약육강식의 세상에 던져진 사회 초년생과 그가 속한 부서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다양한 에피소드는 사회의 긴장감과 불편한 현실적 괴리감을 고스란히 보여 준다. 반면 사이사이에 배치된 맛깔스런 조연들의 연기가 꽉 조여 오는 압박과 긴장감을 소소한 재미와 여유로 풀어준다. 가장 일반적이고 일상적이어서 밀려나 있었던 불편한 소재가 오히려 관심과 흥행의 요소가 되고, 그 속에 담긴 진한 현실감은 개성있는 조연들과 작은 이야기들의 조합을 통해 완화되고 더욱 풍성해진다.
건축
이제 우리 얘기다. 건축 얘기이고, 설계 얘기이다. 진지한 고민이고, 바로 코앞에 펼쳐진 현실이다. 당장 풀어야 할 문제고, 당장 제출해야 할 과제다. 시간을 쪼게 알차게 계획을 세우고 허튼 작업, 소모적인 토론, 쓸모 없는 공허한 넋두리를 배제한다. 다만 잠시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길고 깊은 심호흡을, 가까이 혹은 멀리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려 한다. 어디서 시작했는지 어디까지 왔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아니면 그 어떤 의미조차도 배제한 채 시간의 흐름에 잠시 몸과 맘을 내려놓는다. 버려진 혹은 버려질 시간이 아닌, 자칫 지쳐 쓰러지고 그만 놓아주려던 지난날의 열정의 회복과 오늘의 고민과 갈등을 치유할 보다 소중한 시간이 되길 희망한다. 여전히 우리는 건축과 공간에 대해 고민하면서도 일탈과 여유의 추억을 뒤로한 채, 점점 더 커지는 시간의 효율성과 가치에 대한 부담으로 허우적거린다. 그래도 여전히 우리는 좋은 디자인과 건강한 공간을 꿈꾸며 고민하고 있다. 오늘 정림의 몇몇과 누군가에게 맡겨 두었을 작은 얘깃거리와 고민을, 혹시나 술 한 잔 걸치며 회자되는 그리움을, 그래도 계속 찾고 추구해야 할 희망과 가치를 나누고자 잠시 자리를 마련했다. 여전히 바쁜 시간이다. 그리고 그 틈새에 만든 지금 이 시간, 그 안에 담긴 가치를 꿈꾸며 잠시 얘기를 나눠본다.
이호, “건축, 사람 그리고 정림, 호흡을 가다듬다”, 《2015 정림건축 연감집》 발췌 재구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