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에 대응하며 시대를 선도하다, 이명진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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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출범한 첨단설계부문은 급변하는 시장 상황에 신속하고 정확하게 대응하겠다는 정림건축의 의지이자 혁신의 단면이다. 정림건축은 유수의 기업과 일하며 전통 제조업에서 미래 전략 사업으로 전환되는 국내 산업의 결정적 순간을 목격했다. 7년 전부터 반도체 관련 분야에 대응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또 정림건축은 사회와 시장의 요구, 혹은 감지되는 변화에 기민하게 반응했다. 중앙 집중화된 거대 조직 대신 전문성에 따라 분화된 비즈니스 유닛(BU) 역시 하나의 예다. 지속 가능한 건축이라는 현대사회의 요구 앞에서 이명진 첨단설계부문 대표는 정림건축의 레거시 ‘조직 설계’의 가능성을 본다. 전문성과 자생력을 갖추고 자발적 연대를 이루는 미래를.

젊은 리더십

2004년 정림건축에 입사해 어느새 20년이 지났습니다. 정림건축에서 스스로 어떤 건축가가 되었다고 자평하나요?

학창 시절, 세계 건축계에서 한국 건축가의 힘을 보여주고 싶다는 원대한 꿈을 꿨어요. 좋은 스승을 좇으라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듣고 자랐는데, 정림건축이 딱 그런 곳이었지요. 디자인과 기술을 겸비한 기본기를 갖췄고, 새로운 도전을 즐길 수 있는 건축가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정림건축은 ‘건축사관학교’라 불릴 만큼 교육 시스템이 훌륭한 데다 좋은 스승이 많았어요. 선배들은 자신의 경험을 전수, 안내하면서 길라잡이 역할을 했어요. 직급이나 나이를 떠나 하고자 하는 건축이 있다면 기회를 주고 의견을 경청하는 사내 문화가 있었고요. 경영 역량을 갖춘 건축가, 경영자인 동시에 건축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업무 공간 인테리어부터 인사, 재무, 마케팅 등 여러 업무를 경험한 덕분이에요. ‘건축적 역량 플러스 리더십’이 정림건축의 인재상이거든요.

‘건축은 대응이다’라는 건축관을 가지고 있는데, 이에 대해 부연한다면요?

고정된 건축 스타일과 업무 방식, 또는 경험 및 창발 위주 프로세스에 반어적으로 표현한 말인데요. 현대사회나 산업의 변화 속도는 2010년대에 시작된 4차 산업혁명 이후 한층 가속화되고 있어요. 삶의 방식, 일하는 방식, 이동 방식, 소비 방식, 정보를 저장하고 활용하는 방식 등이 급변하고 있지요. 그 발전 속도는 늘 건축을 능가합니다. 간극이 존재해요. 이런 상황에서 건축이 제공하는 서비스는 고객을 만족시키고 있나? 건축은 다른 분야와 벽을 세우면서 업역을 좁히진 않나?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민감하게 센서를 작동시켜 변화를 감지, 반응해야 한다는 결과에 이르지요. 설계를 진행하는 과정에선 주장보다 설득과 합의가 우선시되고, 건축적 표현보다는 솔루션을 요구받아요. 과학과 기술, 이성 기반의 프로세스 설계가 중요해졌다는 의미지요.

올해(2024) 정림건축 첨단설계부문 대표로 취임했습니다. ‘젊은 리더십’에 거는 기대가 큰데, 소감과 포부가 궁금합니다.

창업자 정신으로 회사를 이끄는 대표가 되고 싶습니다. 정림건축에서는 새로운 시도와 혁신이 계속되었어요. 젊은 대표가 나올 수 있는 배경도 거기에 있지요. 건축가이자 경영인으로서 성공 모델을 만드는 건 저의 숙제이기도 한데, 회사가 이만한 시도를 했으니 저는 그에 부응해야겠지요. 젊다는 것을 장점으로 미래를 도모해 가는 것이 곧 창업자 정신 같기도 해요. 과거, 정림건축의 행보는 과감했거든요. 수평적 조직을 만들고, 조직 설계를 만들어냈어요. 오늘의 저는 ‘거인의 어깨’에 올라탄 셈인데, 그러니 멀리 봐야지요. 제2의 창업가 정신으로 정림건축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것이 제 역할이자 포부입니다. 업계 안팎의 흐름을 주시하면서 적절한 대응을 통해 동료, 후배들이 행복하게 건축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도 제 몫이고요.

미래 대응을 기업의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정림건축에서 첨단설계 분야와 시장에 대해 지난날 어떻게 전망하고 대응했는지 그 과정이 궁금합니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면 발주처, 나아가 시대와 사회의 요구를 접할 수밖에 없어요. 꼭 건축이 아니더라도 현 상황을 유심히 살피면, 산업구조의 재편부터 기업과 클라이언트가 중요시하는 가치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어요. 우리나라 산업구조가 전통 제조업에서 미래 전략 산업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목격했고, 반도체 관련 시설 프로젝트를 맡으며 7년 전부터 대응을 준비했지요. 한때 ‘더 빨리, 더 멀리’ 같은 캐치프레이즈가 만연하다가 언제부턴가 기업의 사회적 역할과 책무, 환경에 대한 책임에 관한 목소리로 바뀌었어요. 건축가는 사람들의 꿈과 열망이 충만할 때 찾는 직업이잖아요. 열망 가득한 클라이언트를 상대하며 긴밀히 소통하는 경험, 그 데이터를 근거로 일어날 변화를 짐작할 수 있었지요. 예측이나 전망보다는 필연적으로 변화를 감지하는 정도라고 해두지요. 지금 정림건축이 설계하는 건축물은 결국 미래에 대한 시뮬레이션이에요.

디자인 파이어니어(pioneer), 정림건축 첨단설계부문

첨단설계부문과 설계부문 분리를 비롯해 BU제 시행을 통해 기대하는 바는 무엇인가요?

변화하는 기술과 산업의 흐름을 살펴보면, 다변화는 물론 전문성이 통제 혹은 조절 불가한 영역에 맞닿아 있어요. 요즘 클라이언트는 건축가보다 건축을 더 잘 알아요. 건축 수준을 두고 정림건축에 기대하는 부분도 양적인 것보다 질적인 것이 크고요. 조직 혁신은 중앙 집중화된 거대 조직이 아닌 분화된 조직으로 시장과 사회에 대응하겠다는 의지예요. BU는 설계부문 14개, 첨단설계부문 4개, 총 18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저마다 규모가 다른데, 향후 시장의 요구가 줄어든다면 각 조직도 줄어들 거예요. 사회 혹은 클라이언트를 위해 정림건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자율성을 가진 각 조직이 성장, 병합, 확장할 수 있어요. 다양성과 통합성을 동시에 이끌어낼 방법이자 성숙도의 시너지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이라고 봐요. 자칫 ‘사일로 이펙트’, 속한 팀의 일만 하는 부서 이기주의 꼴이 날 수 있지요. 그럼에도 오랜 교육 시스템, 수평적 조직 문화, 사람을 길러내는 리더십 역량 등이 녹아 있으니 모험일지언정 실보다 득이 클 거예요. 시장의 요구는 이 모양 저 모양 제각각인데 단일한 형태로 대응한다면 공극이 생기겠지요. 그러니 우리도 이 모양 저 모양 취하자는 거예요. 모양이 다르더라도 결국 하나예요. 그 믿음으로 달려나가고 있습니다.

정림건축 첨단설계부문에서 기술은 어떤 의미인가요?

먼저 공학으로서의 기술입니다. 공학적 기술은 첨단설계부문에서 중요한 부분이자 기본인데, 활용의 대상이기도 해요. 두 번째, 대상으로서의 기술입니다. 반도체, 이차전지, 자동차, UAM, 로봇, 정보, AI, 모듈러, OSC, 신에너지, 에너지 절감 등은 미래를 이끄는 산업에서 새롭게 등장한 기술이고, 이해의 대상이지요. 신기술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해요. 세 번째, 일하는 방식으로서의 기술입니다. 일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기도 한데, 단시간 내에 압축적, 효율적, 즉각적으로 클라이언트나 사회의 요구에 대응해야 하는 시대에 일하는 사고방식, 툴을 아우르는 DT와도 연결되는 이야기입니다.

GT(그린 트랜스포메이션)와 DT(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는 정림건축 첨단설계부문의 특장점이기도 한데, 이렇게 방향을 설정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GT는 정림건축이 지향하는 가치, DT는 정림건축이 지향하는 워크 스타일과 전략입니다. 기후변화 대응이나 에너지 절감 등은 고객과 사회의 엄준한 요구일뿐더러 환경적 가치와 무게 역시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는 건데요. 정림건축은 2000년대 후반 친환경 연구소를 조성해 관련 활동을 오래도록 펼쳐왔어요. 정림건축이 세상을 이롭게 하는 데에서 건축가적 소명에 환경이 빠질 수 없어요. 더욱이 정림건축의 많은 클라이언트에게 수출의 비중이 큰데, 환경적 가치를 지키지 않으면 국제적 제재를 받을 수 있어요. 생존에 직결되는 문제죠. 에너지, 자원 순환, 회복 탄력성, 지역성, 건강 등 환경에 관해서는 2030 계획이 수립되어 있고, 친환경 툴이나 탄소 절감 가이드, 친환경 설계 매뉴얼 등을 도입했어요. 올해(2024) 말 ESG 경영 보고서를 발행할 예정이고요.

마지막으로 정림건축 첨단설계부문의 계획과 방향, 비전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미래 기술과 과학적 프로세스를 통해 산업과 환경 이슈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디자인 파이어니어(pioneer)를 지향합니다. 이제 한국의 첨단산업과 기업이 세계를 선도하고 있어요. 최고의 기술력을 가진 한국 기업을 상대로 인프라와 발판을 건설하는 한국 건축의 역할에 대한 소명이 있습니다. 또 정림건축을 건축가로 성장하기 위한 건강한 필드로 만들고 싶어요. 정림건축은 건축에 꿈을 두고 실현하려는 의지가 있는 개인을 돕고 성장시키는 회사입니다. 이런 기업 문화와 시스템을 통해 저는 어릴 적 꿈을 이뤘고, 건축가로 성장했어요. 이제는 그 경험을 나누고 싶습니다.

정림 피플앤웍스 시리즈 『N.3 정림다움』에서 발췌

이명진. 첨단설계부문 대표이사. 2004년에 입사해 디자인랩과 설계그룹에서 디자인을 이끌어왔으며 2024년 첨단설계부문 대표이사에 취임했다. 업무, 교육 연구, 의료, 데이터센터 등 다양한 분야의 건축 작업을 수행했고 한국건축문화대상, 대구시건축상, 녹색건축 국토교통부장관상 등을 수상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SK하이닉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네이버 데이터센터 각 세종, 현대자동차 하이테크센터, 카카오 제주 아지트, 이대서울병원,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 원주세브란스 기독병원, 울산과학기술원 이차전지 산학연 연구센터, 대구은행 제2본점, SK 서린빌딩 뉴 워크플레이스 컨설팅이 있다.

부산항 북항 마리나 설계팀 대담: 중간 설계

부산항 북항 마리나의 현상(계획) 설계안을 분석했을 때 특화 프로그램의 부재로 인해 운영 측면에서 대응하기 어렵다는 약점이 대두되었다. 이에 생활 밀착형 프로그램을 도입하여 부산 지역 시민들의 접근성을 높이고 해양 레저 문화를 기반으로 한 커뮤니티 형성과 이용 활성화를 꾀해야 한다는 시사점이 도출되었다.
일시. 2023년 8월 9일 14:15 – 15:15
참여. 박재완, 천지혜, 오정택, 오가영
진행. 장혜인

1. 추가 프로그램
2. 국외 마리나 답사 및 분석
3. 요트 파빌리온 계획
4. 모형 제작 과정
5. 주 52시간제, 서로 도우며 일하기
6. 마치며

추가 프로그램

천지혜

현상에 당선되고 중간 설계에 본격적으로 돌입하자마자 팀이 새롭게 구성되었어요. 이 때 중심 역할을 한 사람들이 (오)정택, (오)가영, (김)영빈이었고 여기에 (김)현삼 소장님까지 계셨죠. 일반 현상 설계는 보통 계획 설계(Schematic Design, SD)로 간주해요. 그래서 ‘SD 팩이 어느 정도 구성됐으니 이대로 DD(Design Development, 중간 설계) 진행하면 되겠구나’하며 행복하게 뚜껑을 열었는데…. 발주처에서 프로그램을 새로 추가하겠다시는 거예요. 무엇을 추가할지는 미정이었고, 추가할 프로그램의 타당성 여부까지 파악해야 하니 사업성 검토 용역도 들어간 셈이었어요.

장혜인

어떤 프로그램을 넣어야 할지도 팀에서 다 찾으신 거고요?

천지혜

발주처에서 먼저 세 가지를 알려줬어요. 생존 수영장, 스킨 스쿠버, 실내 서핑장. 이 중 실내 서핑장을 제외한 나머지로 가게 됐죠. 공공에서 발주하는 현상 설계는 공사비 기반으로 계약하다 보니 프로그램 변경 시 기존 대비 비용이 얼마큼 추가된다는 근거가 제시되어야 해요. 프로그램이 추가된 설계 대안 2개를 작성해 각각의 예상 소요 비용을 새로 산출해야 했어요.

박재완

즉, 프로그램 제안이 최종적으로 반영될지 미지수인 상태에서 우선 평면적으로 풀어야 했던 거죠. 이 대안들을 작성하느라 정택 님이 많이 고생했어요. 수영장이랑 스킨스쿠버 풀을 육상 적층 시설 뒤에 넣어 건축면적을 최소화하는 식으로 만들었었죠?

오정택

네. 그러면서 수영장과 스쿠버 풀을 위아래로 쌓았죠. 개인적으로 저는 프로그램이 추가되는 게 오히려 좋았어요. 사실 프로젝트를 하면서 스스로에게 즐거움이나 보람을 찾아주려고 노력하고 있었거든요. 추가 프로그램을 요구 받게 되자 ‘기회다’ 싶었죠. 현상안에 없었던 시설을 백지 상태에서 만드는 일이니 보다 신경 써서 작업했어요. 그리고 대안에 따른 견적을 산출하는 기간과 국외 답사 기간이 겹쳐서, 지혜 님과 이틀에 한 번 꼴로 연락하면서 견적을 맞춰 나갔고요.

천지혜

시차가 정반대로 나니까, (웃음) 사무실에서 오후에 작업한 양을 보내주면 우리는 아침에 확인해서 피드백 하는 식으로, 그렇게 진행했어요. 견적은 건축뿐만 아니라 구조나 설비 같은 타 분야에서도 받아야 하는데, 그런 취합 과정을 정택 님이 같이 도맡아서 해 줬죠.

국외 마리나 답사 및 분석

장혜인

자료를 보니 국외 답사는 규모가 꽤 컸던 것 같아요.

천지혜

발주처 분들을 모시고 정림건축, ING, 한국항만기술단 3사가 모두 참여했어요. BPA에서는 마리나 프로젝트 담당 실장님, 설계 관리 감독님, 마리나 운영 담당하시는 분이 합류하셨고요. 체류와 이동 기간을 포함해 9박 10일 동안 지구 반 바퀴를 돌면서 11개 마리나를 방문했습니다. 저희를 인솔하기 위해 답사지마다 계류 시설 담당자, 마리나 운영 담당자, 심지어는 마리나 회장님이 나오시기도 해서 운영 면에서 여러 주체와 역할이 있다는 걸 실감하기도 했어요.

장혜인

가셔서는 무얼 조사하고자 했는지.

천지혜

인터뷰 질문지는 마리나 시설 설계와 운영 전략, 크게 두 축으로 준비했었어요. 시설 설계 관해서는 저희가 사전 조사를 주로 도맡았었고, 운영에 관해서는 BPA 담당자 분이 답사 시에 직접 조사하시는 걸로 하고요.

오정택

11개 답사지는 유명하지 않은 마리나가 다수였어요. 구글 어스에서 찾아보면 어느 외딴 마을에 만들어져 있거나 하기도 했어요. 리뷰 사진들은 동네 사람들이 직접 찍어 올린 것들이라, ‘이분들은 이렇게 작은 마리나를 이렇게도 쓰시는구나’하고 놀라웠던 동시에 현실적으로 와 닿았었어요.

천지혜

규모가 제일 작았던 두 곳 말이죠? 그러니 11개 답사지는 어디 대단히 저명한 시설로만 추린 것도 실은 아니었던 거예요. 마리나를 아시는 분들에게 ‘뭐든 좋으니 이름이라도 알려달라’며 받은 곳들도 있었거든요.

박재완

그리고 거길 가 보지 않았다면 보고서도 맥아리가 없었을 거예요.

장혜인

말씀하신 대로 사전 보고서와 결과 보고서, 두 가지가 작성되어 있어요. 분석이라고 하면 어떤 틀을 설정하느냐에서 출발해 객관적으로 설득되는 수치나 결과가 나와야 할 텐데요. 어떻게 작성하셨는지?

오정택

사전 보고서 양식은 개발기획본부에서 연구 용역으로 참여했던 ‘서울시 토지자원 활용 카드’를 참고해 제작했어요. 사이트 조사 단계에서 제작된 점이 동일했고, 평가 항목도 있었거든요. ‘분석 리포트’가 필요하다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니 과거 경험들 중에서 쓸 만한 걸 찾아온 결과였어요.

천지혜

그래서 일반적으로 작성하는 건축 답사지의 틀과는 또 달랐어요. 해역과 수역의 범위, 해역 시설 대비 상부 시설의 비율 등의 고민들이 있었고요. 비화가 있는데, 당시 한 타이어 회사 광고 중에 육각형 레이더 차트를 이용한 장면이 있었어요. 타이어 별로 강점이나 균형점을 설명하면서요. 그 차트를 보고서에 활용했어요.

장혜인

영감을 얻으신 거군요.

천지혜

이 6가지 팩터가 재미있는데요, 마리나 설계에 필요한 기본 요소들이면서도 우리 사이트 상황에 적극적으로 참고할 만한 기준들이기도 해요. 북항 마리나는 부산역에서 가까우니까 접근성을 알아보아야 했고, 고가의 선박과 요트를 다루는 마리나를 공공이 즐기려면 이용 측면의 개방성도 알아볼 필요가 있었고요. 생존 수영장과 스킨스쿠버 풀 등의 특화 프로그램을 고려 중이었는데 다른 마리나에도 이러한 플러스 알파 개념의 시설이 있는지, 있다면 어떻게 운영하는지도 조사하고자 했죠. 이외에도 기본 시설 규모는 얼마나 되는지, 기능 시설은 이용하기에 편리한지, 클럽하우스나 식당과 숙박 등 지원 시설은 다양한지 등을 기준으로 삼았어요. 이러한 지표들을 만들어 저희 나름대로 점수를 매겨본 것이죠.

오가영

차트를 쓰면서도 반신반의 하긴 했어요. 건축에서는 이런 식의 분석을 잘 안 쓰잖아요. 11곳을 답사한 결과로 설계안의 타당성을 뒷받침할 데이터가 잘 나와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면 어쩌나 하고요.

오정택

사실 이 차트를 만들기 전까지는, 저도 가영도 ‘이게 될까? 뭐가 나오나?’ 그런데 작성을 마치는 순간,

오가영, 오정택

(동시에) 규모 순으로 정렬하면 나오겠다. 이거 되겠다.

천지혜

다녀와서 모아보니 굉장히 재밌더라고요. 시설 규모 순으로 나열해 보니 제일 작은 네덜란드 마리나(WSV DE Spiegel)와 제일 큰 모나코 마리나(Yacht Club de Monaco), 두 곳의 유사점이 눈에 들어왔어요. 특화 프로그램이 경쟁력을 크게 갖추고 있고, 기능 시설 편의성이 높죠. 무엇보다 주목했던 건 두 마리나 모두 본인들의 특화 프로그램을 설명할 때 ‘삶에 깊이 관여하는 마리나, 삶의 한 요소로서 요트 문화’를 공통으로 강조하던 모습이었어요.

조사한 국외 마리나 사례 중 기본 시설 규모가 가장 작은 네덜란드 WSV de Spiegel Marina ⓒ WSV de Spiegel Marina

박재완

네덜란드 WSV DE Spiegel은 완전한 지역 밀착형 마리나예요. 공공이 운영하는 소규모 마리나로서 요트 문화를 기반으로 한 교육이나 축제 등 여러 방면으로 지역 커뮤니티 결속에 일정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어요. 인터뷰 시작 전 마을 당구장 사장님께서 일단 앉아서 술부터 들라고 하셨는데, 털털한 농부 아저씨의 환대를 받는 기분이었달까요. (웃음) 사장님은 ‘지역에 맞는 마리나’를 가지도록 제언하셨어요. 한편 모나코 Yacht Club de Monaco는 초호화 대형 선박을 다루는 리조트형 마리나로 클럽의 회장님을 인터뷰할 수 있었는데, 마리나란 “류 드 비(Lieue de vie)”, 즉 ‘삶의 장’이라는 말씀을 들었어요. “보트와 선박만 정착시켜주는 마리나는 생활과 단절된 것이다. 세계 최정상급 마리나로서 우리가 가장 주의를 기울이는 일은 지역 주민과 어린이들에게 카누와 요트를 제공하는 것”이라고요. 그러면 지역 관련된 미팅도 수행하느냐고 재차 묻자 “그게 없으면 마리나가 아니다”라고 강조했고요.

조사한 국외 마리나 사례 중 기본 시설 규모가 가장 큰 모나코 Yacht Club de Monaco ⓒ Yacht Club de Monaco

천지혜

사전 분석 자료와 답사에서 나온 화두를 취합하자 완전히 다른 성격과 위치에서 접점이 생긴 거죠. 가영 님과 정택 님이 꼼꼼히 리서치 해준 덕에 나중에 결론 내기도 좀 더 쉬웠어요.

오가영

국외 답사를 통해 ‘생활형 마리나는 규모에 관계없이 그 지역에서 시민들의 생활에 밀접하게 관련이 있고 중요하다’는 분석을 도출했고, 북항 마리나에 이 분석 결과를 대입해 보니 ‘시민들이 잘 사용할 수 있는 프로그램 도입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그에 따라 추가 프로그램으로 고려하고 있던 생존 수영장과 스킨 스쿠버 풀을 설계안에 매끄럽게 안착시킬 수 있게 되었어요. 결론이 들어맞는 순간 굉장히 신기했고, 또 좋았어요.

박재완

추가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타당성을 보고서에서 해소할 수 있어 다행이었어요. 프로젝트를 진행하다 보면 객관적인 분석이나 논리가 한 부분 적절히 뒷받침해 줘야 해요. 현상 설계 때는 “해안선 1%”라는 숫자가, 중간 설계에서는 답사 보고서들이 한몫했던 거죠. 든든한 기분이었어요.

천지혜

이건 정말 정택 님과 가영 님의 날선 분석이 명료하게 맞아떨어진 덕분이에요.

요트 파빌리온 계획

요트 파빌리온 스케치

박재완

가영, 계획안에 했던 수변 카페 설계도 이야기해 줘요.

오가영

지혜 님이 수변 카페를 파빌리온 형태로 계획해 보라고 하셔서 맡게 되었었어요. 그때 저는 정말 햇병아리 신입사원이어서 얼추 뭔가 해 보겠다며 가져는 갔는데, 말을 정말 못했거든요. 지혜 님께서 “계획안을 설득할 때는 프로그램 분석, 계획안의 당위 등을 설명해야 된다”고 조곤조곤 알려주셔서, 어린 마음에 그날 잠 못 이루고. (멋쩍은 웃음) 마음을 다잡고 요트 교육 과정을 꼼꼼하게 스터디해서, 그다음 회의에서는 요트 교육에 필요한 공간들을 설명 드리고, 설계에 필요한 사항들을 차근차근 말씀드릴 수 있었어요. 그런 뒤 재완 님이 디자인을 한 번 잡아 주셨는데, 편형한 매스로 다듬어졌던 것이 기억나요.

천지혜

수변 카페 사이트를 평지로 알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미묘한 레벨 차가 있었던 대지였어요. 건너편 오페라하우스에서 카페를 바라볼 때 더 낮은 눈높이에서 보여야 했는데 처음에 대지 모형을 맡았던 친구가 그 레벨 차를 못 맞추고 어려워했겠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됐죠. 가영에게 보였더니 다시 만들어야겠다고 해서, 그 부분 콘타만 처음부터 다시 만들었어요. 레벨 계획서부터 전부 다시 떠서요.

오정택

맞아요. 전체 모형에서 그 부분만 잘라 내고, 가영 님이 새로 만든 부분을 끼워 넣었었죠.

박재완

여기 파빌리온의 녹화된 지붕이 오페라하우스에서 보이도록, 그래서 오페라하우스가 갖는 경관에 지장이 없도록 높이를 최대한 낮추어 계획안을 디벨롭했죠. 그래서 파빌리온 형상 자체가 어디에서든 잘 보이도록 의도했어요. 현장에 와서는 주변에 배기탑이 들어서면서 아쉽게 됐지만요.

오가영

그래도 저는 수변 카페가 들어서는 이 알맹이 땅이 우리 설계 범위 안에 같이 묶여 있었다는 사실이 좋았고, 재미있었어요. 마리나를 계획하면서 마리나에서 바라보는 오페라하우스를 생각했었지만, 반대로 오페라하우스에서 보는 마리나도 생각할 수 있겠죠. 이 수변 카페는 오페라하우스와 가깝지만, 마리나와 같은 어휘를 가지는 한 쌍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또 다른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을까 생각해요. 작으나마 별도의 대지에서 이를 염두하며 계획하는 일은 또 다르니까요. 마리나를 가장 멋진 곳에서 바라볼 수 있는 장소라고 생각해요.

요트 파빌리온 투시도
요트 파빌리온은 마리나 클럽하우스 건물과 오페라하우스를 연계하는 디자인 및 프로그램으로 계획되었다.

모형 제작 과정

장혜인

프로젝트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가 모형인데요. 중간 설계 단계에서는 언제쯤 제작되었나요?

오가영

도중에도 스터디용으로 많이 만들었었고, 마지막 모형은 중간 보고 준비하면서 만들었었어요. 당시 설계1본부는 무조건 모형을 만들어야 했는데, 특히 (김)동관 님과 재완 님 팀이 모형으로 유명했어요. (웃음)

박재완

지금은 회사에서 모형을 잘 안 만드는 분위기가 됐지만요. 마지막 모형은 여기 가영 님과, 지금은 퇴사한 김부빈 님이 만든 모형이었어요. 그동안 수많은 모형을 만들어오긴 했지만 ‘왜 만드는지’ 절절하게 느끼기로 손에 꼽는 순간이었어요. 건물이 이렇게 큰 줄 그때 처음 실감했고, 디테일 이전에 공간에 부여하는 성격이나 필요한 상세 계획들이 비어 있었음을 겨우 알았던 거죠. 중요한 역할을 해준 모형이에요.

천지혜

제작하기 전에 축척을 정하잖아요. 우리 건물은 양 옆으로 길다 보니 기왕이면 크기가 좀 컸으면 좋겠다고 요청했거든요. 그럼 A1 종이 규격으로 제작해도 594×841mm인데,

오가영

그랬더니 건물이 반으로 잘리고 있었죠.

천지혜

그래서 거의 A0 크기까지 갔어요. 가영 님이 캐드 화면을 촥 펼치는데… 속으로는 ‘헉’하고 놀랐지만 짐짓 의연하게 “그래. 가영아. 좋다. 이렇게 가자.” (일동 웃음) 규모만큼 하중도 꽤나 나가는데 모형을 고정할 만한 판도 마땅히 없었어요. 둘러보니 900×1800mm 크기의 회의실 탁자 하나가 남길래, 설계1본부장이었던 전상우 님께 ‘테이블 하나쯤 없어도 되죠?’ 하면서 양해를 구하고, 정택이 드라이버를 들고 와 테이블 나사들을 하나씩 풀었죠.

박재완

평소처럼 우드락으로 바닥을 만들기엔 모형이 여간 무겁지 않았으니까요. 테이블에 색지 바르고 그냥 붙여버렸죠.

천지혜

디테일 수준만 놓고 보면 사실 중간 보고용 모형은 이렇게까지 만들지 않아도 돼요. 다만 우리가 공간감을 실감하면서 도면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스터디가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 내부도 다 확인할 수 있도록 만들다 보니까요. 가영은 특히 공간을 다 이해하고 모형을 만드는 친구라 도움이 정말 많이 됐어요.

박재완

모형은 뚜껑을 열고 닫듯이 조립과 분리가 가능했어요. 그렇게 만들려면 수평으로 건물을 어떻게 층층이 나눌지도 계획이 필요하고, 실내 마감재까지 입혀야 하니 작업 난이도가 굉장히 높아지거든요.

오가영

3D 모델링에서 볼 때와 육안으로 물리적인 공간을 체험할 때가 다르잖아요. 완성된 모형은 보통 겉모습만 쉬이 둘러보고 말지만, 만드는 입장에서는 속속들이 공간감을 느끼게 돼요. 모형 작업에서 재미를 느끼는 부분이에요.

오정택

그 가치가 있는 거죠. 건축가 알바로 시자를 다룬 『엘 크로키』중 스페인 판티코사(Panticosa)에 지은 스포츠 센터 모형 사진을 표지에 크게 넣은 권호가 있어요. 예전에는 ‘모형을 뭘 이렇게까지 만든담’ 했는데, ‘이 정도로 고민을 많이 한다’는 어떤 선언이었겠더라고요.

주 52시간제, 서로 도우며 일하기

오정택

그러면서 저는 항상 자신 있게 말하는 게, 이만큼 해내면서도 주 52시간제는 지켜냈다는 거예요.

천지혜

지켰나요?

오정택

네. 한 98% 지켰던 것 같습니다. 그것도 저는 가치를 높게 사고 싶어요.

박재완

다들 밀도 있게 일했죠.

오가영

그때 팀원들 스케줄 관리가 굉장히 잘됐었어요. 모형 제작 기간도 거의 한 달이었는데 그것만을 위한 일정표가 따로 있었을 정도였어요. A3로 출력된 일정표에 모형 크기 정하기, 다음 날 목업해 보기, 레이저 작업에 필요한 일들 사전에 준비하기, … 일련의 단계들을 재완 님이 매일 확인해 주셨어요. “오늘은 어디까지 했니? 1층 했니?” (일동 웃음) 모형 제작도 그 정도로 촘촘하게 관리해 주셨으니 가능했던 거예요.

박재완

모형이 크면 클수록, 자칫 했다간 기한 내에 못 만들거든요.

천지혜

그걸 포함해서 팀원들 모두에게서 ‘시간 안에 잘 해보자’는 몰입을 느꼈어요. 이 친구들 화장실은 대체 언제 다녀오나 싶을 만큼 대부분의 시간을 계속 앉아서 작업하더라고요.

오가영

그러다가 누가 슬쩍 다가와서 기둥 썰어 주고 가시고. (웃음) 정택 님이었던가요? 톱으로 기둥 썰어 주시고, 사포도 갈아 주고.

천지혜

그랬죠, 오며가며 잘라 주고 가고. (웃음)

오정택

그러니까 그런 게 좋았어요. 누구든 하루 일과가 조금 일찍 끝나거나 하면 주변을 한번 돌아보았던 것 같아요. 바쁜 친구가 있으면 이렇게 가서, 도와주는 척 수다 떨면서 방해도 살짝 하고. (웃음)

마치며

장혜인

마치면서 팀원 분들의 소회를 들어볼게요. 가영 님부터 말씀해 주시면.

오가영

저는 기룡 님 바톤 이어받고 중간 설계부터 투입된 멤버였는데, 다들 ‘어벤져스’라 부르고 싶을 만큼 팀워크가 잘 맞았던 사람들이었어요. 영빈 님도 정택 님도 너무 잘하시는 분들이라 부담되기도 했는데 스스로가 가능한 역할에서 최선을 다 하자는 태도로 임했었어요. 모형이 그 중 하나였고요. 학부생 때도 모형 제작은 워낙 좋아했었고 그래서 잘 만드는 법도 나름 터득했었으니까, 그걸로 팀에 도움이 되었지 않았나 해요.

천지혜

가영이 당시 2년 차였죠? 우리 건물이 만만찮은 복합시설인데, 저연차였음에도 어려운 프로그램과 어려운 건물을 잘 이해하고 소화해준 덕분이에요. 모형뿐만 아니라 파빌리온 계획이나 답사 보고서 작성까지 폭넓게 활동해 주었으니까요. 프로젝트 진행 자체를 풍부하게 해 준 키맨이었어요.

오정택

저는 14년도 신입사원이니까, 4년 차 정도 되었을 때인데요. 현상 설계 평면을 마리나 프로젝트에서 처음 맡게 되었는데 심지어 프로그램도 다양했었어요. 그렇다 보니 아직 접해 보지 못한 종류의 도면도 있었던 거예요. 호텔 그리는 오정택, 레스토랑 그리는 오정택, 예식장 그리는 오정택이 한 명씩 필요했고… 그 당시 팀의 목표도 ‘중간 도면 그대로 상세 도면 작성이 가능한 수준’을 만들어 보자는 것이었어요. 도면에 정보란 정보는 정말 있는 대로 다 넣었던 것 같아요. 표현한 적은 없지만 새로운 일에서 잘 모르는 부분도, 능력 밖의 일도 많았던 과정이었어요. 그럼에도 태연히 일을 잘해낼 수 있도록 스스로 공부한 적도 많았고요. 다양한 프로그램을 알 수 있어 재미있었지만, 한편으로 일에만 너무 파고들었던 건 아닌가 해요. 지나고 나니 위아래 사람들을 많이 살피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더라고요. 제 역량이 더 좋았다면 가영 같은 팀원들이나 소장님들과도 더 많이 이야기 나누며 재미있게 갈 수 있었을 텐데, 그런 부분을 많이 챙기지 못했다는 생각이 커요.

오가영

그래도 정택 님이 우리 팀의 분위기 메이커였는걸요. 질문도 다 받아주셨는데, 그냥 알려주시는 게 아니라 이 도면을 왜 그려야 하는지부터 차근차근 다 설명해주셨어요. 저희 다들 정택 님에게 많이 배워서 이만큼 계획할 수 있었던 건데요.

오정택

음, 그랬나요. (웃음)

천지혜

너 참 잘 가르쳐. 나중에 가영 같은 제자들을 협력사로 만나. (웃음)

정림 피플앤웍스 시리즈 『N.2 부산항 북항 마리나』에서 발췌

천지혜. 2008년 정림건축에 입사했다. 일산 요진 와이시티 복합개발, 리비아 트리폴리 워터프론트 개발, 영종하늘도시 오피스텔 신축설계, 용인 SK아카데미 마스터플랜 및 리모델링에 참여 또는 진행 중이다. 부산항 북항 마리나 현상 설계, 본 설계 용역. 디자인 감리까지 TL(team leader)로 참여했다.
박재완. 프랑스 빠리-벨빌 국립건축학교에서 도시계획과 건축설계를 배우고 2007년 정림건축에 입사했다. 현대해상 하이비전센터, 아모레퍼시픽뷰티 제2사업장, SK기념관 등을 수행했으며 한국건축문화대상 대통령상(2017), 한국건축가협회 BEST 7 협회상(2017) 등을 수상했다. 부산항 북항 마리나 프로젝트에서는 현상 설계부터 현장 디자인 감리에 이르는 전 과정에 참여했으며, DP(design principal)로서 디자인과 기술적인 부분을 주로 담당했다.
오정택. 2014년 정림건축에 입사, 부산항 북항 마리나를 비롯해 SK기념관, 삼성전자 메가스토어 대전 본점 등을 수행했다. 부산항 북항 마리나 프로젝트 당시 현상 설계부터 중간 설계 마무리 단계까지 참여했다. 현재 플로르건축사사무소를 운영 중이다.
오가영. 2018년 정림건축에 입사해 SK하이닉스 이천 M16 설계용역, 부산항 북항 마리나, SK서비스에이스 이전사옥 인테리어 설계용역 등에 참여했으며 디자인 기획 업무를 거쳐 현재 빅테크 BU에서 근무 중이다. 부산항 북항 마리나 중간 설계 단계에 합류했다.

정림건축 디자인위원회 대담: 들어가며

중대형급 이상의 건축사무소는 자본 논리로 구축되는 사업성과, 사용자와 도시를 대하는 공공 이데올로기 사이에서 그 균형을 찾기 마련이다. 건축주의 요구를 충실히 이행하는 동시에 건물이 지닌 사회적 가치와 공공적 자산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은, 정림건축이라는 ‘집단’이 창설된 초창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 고민해온 지점이기도 하다. 공공성이란 건축과 도시 환경을 일구는 이들이라면 기본적으로 갖추게 되는 태도이나, 거친 아이디어일지언정 이를 끝내 구현해내는 일, 나아가 한 사무소의 특성이라 손꼽을 수 있을 만큼 포트폴리오가 쌓이는 일은 또 다른 차원이다.

생각공장 프로젝트를 필두로, 정림건축 디자인위원회에게 ‘공공성’에 대해 물었다. 정림건축이 생각하는 공공성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으며 어떤 방식으로 구현되어왔는지, 현대 한국 건축에서 (그리고 실무에서) 공공성이라는 화두는 어떻게 인식될 수 있을지를 들어보았다.
참석. 기현철, 김경훈, 김동관, 김유나, 박재완, 이명진, 이호, 홍성현
진행. 장혜인
정리. 윤솔희

공공성이란 무엇인가

장혜인

시간을 마련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는 한국 현대 건축 계보에서 공공성은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 당산동 생각공장을 비롯한 정림건축의 프로젝트에서는 이 공공성이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를 말씀 들어보고자 합니다. 먼저 어떤 프로젝트부터 이야기해볼까요?

기현철

공공기관에서 발주한 프로젝트 외에 상업시설부터 보면 좋겠습니다. 하남 스타필드, 영등포 타임스퀘어에서 공공성은 무엇이었을까요? 이 두 프로젝트는 은연 중에 정림건축의 대표작으로 자주 거론되지요. 규모가 커서, 유명한 클라이언트라서 그럴 수도 있지만 저는 좀 다른 생각이 있습니다. 저희 집이 스타필드 고양과 가까이 있어 자주 방문하는데요. 그곳에 갈 때마다 쇼핑객뿐만 아니라 만보기를 차고 걷는 어르신, 뛰어다니는 어린이,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반려가족들을 봅니다. 다양한 이들이 어울려 각자의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지요. 어쩌면 이러한 풍경이 공공성을 이해하는 실마리가 되지 않을까요? 저는 공공성이란 유료와 무료, 소유의 개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개인 차원에서 가질 수 없는 것을 여럿이 향유할 수 있는 상태라고도 봅니다.

김동관

저도 스타필드에 자주 가는데요. 마당, 공원의 위치와 규모, 공용공간의 폭 등이 적절해 계속 머무르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고요. 저녁 때 가보면 정말 좋아요. 그 모습을 보면서 반드시 공공기관의 프로젝트여야 공공성을 구현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느꼈어요. 이 맥락에서 저는 정림건축 앞 상공회의소 건물도 정말 좋아합니다. 준공한지 벌써 20년이 넘었을 텐데 여전히 1층 로비는 쾌적하고 남대문과의 버퍼 영역이 잘 설정돼 어색함이 없어요. 재료 선택이나 야외 공간 배치 등은 지금 봐도 촌스럽지 않고 아름답죠.

김경훈

해묵은 주제인데도 공공성은 여전히 뜨거운 주제죠. (웃음) 시대에 따라 공공성을 보는 관점이 달라져 왔기 때문일 텐데요. 스타필드를 바라보는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그곳의 넓은 복도와 큰 보이드를 공공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보다는 수용인원이 많아야 하니까, 더 많은 사람들이 머물러야 하니까 더 크고 넓게 짓는 데에 목적이 있었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경험의 질을 우선시하는 요즘 트렌드와 공공성이 맞닿은 사례이죠. 하지만 그 틈에서 배울 건 분명히 있습니다. ‘일반 근린생활시설에서 상업성과 공공성을 어떻게 연결 지을 수 있을까? 관리 주체가 명확한 대형 상업시설과 달리 관리 주체가 불분명한 중소형 상업시설에서 지속 가능한 공공성이란 무엇일까? 어떤 의미로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같은 이상을 위해 다른 건축물이 처한 상황과 클라이언트의 관점을 복합적으로 분석하면서 말이에요.

박재완

이런 생각도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공공성이란 가치를 과잉 소비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일례로 프랑스 유학 시절 도시계획 시간에 과제를 발표하며 ‘세미-퍼블릭 스페이스’를 언급한 적이 있어요. 그랬더니 교수님이 “세미-퍼블릭이 뭐죠? 한국에는 그런 게 있나요?”라고 되묻더군요. 그것의 운영 주체, 관리 주체는 누구냐고 물으면서요. 정림건축 포트폴리오를 보면 프로젝트 둘에 한 번 꼴로 세미-퍼블릭 스페이스가 등장합니다. 그만큼 관대하죠. 그래서 저는 우리가 사용하는 공공성을 조금 더 냉정하게, 더 강하게 말하면 의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상업성을 효과적으로 보완하는 요소로서 공공성이란 말을 붙이는 건 아닌지, 공공성 추구가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기에 상위에 올려둔 건 아닌지. 우리의 방향성을 점검하는 과정이 필요하죠.

Power of 10+ 개념도. (c)Project for Public Spaces

김유나

정림건축이 생각하는 공공성이란 무엇인지 솔직하게 직시할 필요가 있다는 말씀에 공감해요. 장소만들기(placemaking)에 기반해 커뮤니티 형성을 지원하는 뉴욕 비영리단체 ‘공공공간을 위한 프로젝트(Project for Public Spaces)’는 공공성을 만드는 10가지 요소를 <파워 오브 텐(The Power of 10+)>이란 제목으로 정리했어요. 앉을 수 있는 곳, 뛰어놀 수 있는 놀이터, 만질 수 있는 예술, 들을 수 있는 음악, 먹을 수 있는 음식, 경험할 수 있는 역사, 만날 수 있는 사람 등이 포함되죠. 저는 공공성이란 사람들 사이에서 공유되는 경험이고, 건축가의 역할은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모일 수 있을지를 디자인하는 일이라고 봐요. 그러니 공공성을 만드는 데 정량적인 법적 근거, 예컨대 ‘5%의 공개공지를 만든다’가 절대 목표가 아니라 그 공개공지에서 어떤 사람들이 무슨 활동을 할 수 있는지를 그려내고 제안하는 게 중요하단 거죠. 또 대중과의 커뮤니케이션 측면도 고려해야 해요. 예를 들면 미국에는 공개공지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웹사이트가 있어요. 위치, 운영주체, 관리자 정보 열람뿐만 아니라 문의접수도 하죠. 우리나라 일반 대중은 공개공지란 개념도 낯설어하는 게 현실이에요.

홍성현

한국 현대 건축에서 광장은 실제 공공성을 위한 제안이기보다는, 말씀하신 것처럼 실무에서 인허가를 통과하기 위한 법적 도구에 가까웠죠. 그렇다면 이러한 현실 또한 한국 현대 건축의 조건과 언어로 해석해야 하지 않을지요.

기현철

우리 정서에 맞는 공공공간 유형 개발 역시 활발하게 일어나야 한다고 봅니다. 서구권의 광장, 플라자를 공공성의 공간화 모델로 참조하면서 두레마당, 어울림 마당 등을 만들고 있지만 이들은 사실 활용도가 굉장히 낮거든요.

김유나

동시에 법규 보완도 필요할 테고요. 현행 제도는 경관적인 측면에서만 성과를 요구하고 있거든요. 앞으로는 현대 건축에서 공공성을 확보할 때 어떤 고민과 제안이 따라야 하는지 지침이 필요할 것 같아요.

박재완

서울 마곡지구에 신축 건물이 늘어나며 공개공지가 많이 생겨났지만, 이용 면에서는 아직 미지수예요. 공공성을 위한 공공공간은 그저 만드는 것만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누구를 위해’ 등의 단서를 구체화하는 과정이 설계 단계에서부터 이뤄져야 해요.

김유나

그런 면에서 당산동 생각공장의 선큰 광장이 매우 인상적이었어요. 앞으로 생각공장 입주자들이, 일대의 주민들이 이곳에서 어떤 일을 펼칠까 궁금해질 정도로 구체적인 공공성이었어요.

이명진

지식산업센터란 유형은 쉽게 말해 ‘신식’이죠. 요즘 생긴 프로그램이잖아요. 도심 활성화를 위해 도입된 개념인데 분양이란 1차적 목표가 있다 보니 대개 규격화, 표준화에 맞춰져 있어요. 당산동 생각공장의 선큰 광장은 그 틈에서 탄생한 공공성이라 더욱 재미있는 것 같아요. 상업적 가치를 충족하면서도 공공성을 입체적으로 해결한 건축적 해법이 돋보이죠.

스타필드 하남의 실내 아트리움
생각공장 당산의 선큰 광장

정림건축은 공공성을 어떻게 만드는가

이명진

저는 공공성이란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특별한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같은 장소에 같은 기억을 가진 이들이 공동체이고 건축가는 그 과정에 기여해야 한다고 봐요. 상업시설 설계에는 특수한 목적, 그러니까 재화 판매를 위한 로직이 존재해요. ‘시계는 가린다’, ‘재화와 복도 사이 거리는 이 정도가 적당하다’, ‘고개를 들었을 때 위층 상점 간판이 보여야 한다’ 등의 기본 지침들이 철저하게 상거래에 맞춰져 있죠. 공공적 이벤트 역시 결과적으로 장사가 잘 되게 하려는 목적을 기저에 깔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거예요. 다만 가치 소비, 경험 소비라는 현대 트렌드가 맞물리면서 상업시설을 짓는 건축주들도 사람들이 편안하게 머물 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건축적 노력을 하고 있다고 봐요. 결국 건축가는 상업의 논리, 개인(클라이언트)의 니즈 등 어느 한 쪽 입장에 편중되지 않고 공공의 안녕과 행복, 도시적 맥락, 나아가 역사성과 시간성까지 더해 시공간적 가치를 버무려 주는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바로 그곳에 정림건축이 해야 할 일, 그리고 공공성에 대한 태도가 있다고 봅니다.

김영훈

공동주택 설계나 복합 단지 설계에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대중의 안목은 높아졌고, 문화를 사고 파는 것이 트렌드이잖아요. 누구나 자신의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려고 노력하죠. 도면 앞에서 우리는 가치 있는 시간을 만들어줄 공간이란 과연 무엇인지 계속 고민하며 그려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명진

공공성을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개발사의 시각과 자세도 중요해요. 일본 모리 빌딩의 경우 프로젝트 기간이 20~30년 가량 된다고 합니다. 일본 정부와 개발사, 설계사 등이 주민 또는 상권협의회와 만나는 횟수는 1천 번이 넘어간다는군요. 이 지역을 어떻게 개발할지, 상생하는 방안은 무엇일지 긴 시간 동안 자주, 테이블에서 함께 논의하는 것이지요. 본질적으로 운영이 잘 되는, 지속 가능한 공공성은 이 시간에서 탄생한다고 봅니다.

모리 빌딩. (c)Mori Building Co. Ltd.

김경훈

750개의 개인 상가들이 밀집한 김포 라베니체 프로젝트에서 정림건축이 만드는 공공성은 대지로의 접근성을 높이는 과정에서 발현되었다고 봐요. 오래 방치된 땅을 매입한 클라이언트는 이번 투자로 일대의 활기를 만들겠다는 의지가 분명했는데 문제는 지구단위계획상 대지와 도시가 연결될 수 없다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어요. 이 과정에서 정림건축은 역으로 김포시에 지구단위계획 수정을 요청하면서 공공과 민간 모두 윈윈할 수 있는 디자인을 제안했어요. 양측의 이견을 설득과 합의로 봉합하면서요. 저는 이 과정을 통해 우리가 만드는 공공성이란 공공이 참여할 수 있는, 그러니까 공공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드는 데에 있음을 느꼈어요. 건축가라면 클라이언트의 의지로 구현 가능한 공공성에만 만족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김영훈

파라스파라 프로젝트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군요. 2012년 북한산 국립공원 내에 짓는 유일한 리조트로 설계에 착수했는데 프로젝트 도중 인허가 특혜 시비에 휘말려 8년 동안 방치해야 했어요. 끝내 조선호텔앤리조트가 대지를 인수해 파라스파라 리조트로 구현했는데, 저희는 설계 단계에서 대척점을 이루는 요청들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아야 했어요. 서울시와 강북구청의 관심은 공공성 구현, 클라이언트의 관심은 사업성이었거든요. 이 팽팽한 줄다리기 속 장력을 견디며 건축물의 형태, 공공영역, 운영방식 등 다각도로 공공성을 메꿔 넣는 것이 저희의 일이었어요.

우이동 파라스파라

박재완

당산동 생각공장 저층부는 두 가지 레이어를 갖고 있어요. 지하 1층으로 향하는 선큰 광장은 업무시설로 향하는 사적인 레이어, 지상 1층은 도시의 길로 공적인 레이어죠. 그 사이의 균형이 이 땅의 전체적인 안정성을 만들어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당산동 생각공장을 보고 저는 공공성이 냉철한 관점에서 더욱 명확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땅을 비워 놓으면 아이들이 와서 놀겠지, 사람들이 머무르겠지’ 이런 생각은 공상에 그치기 쉽다는 것을요. 그런 부분에서 당산동 생각공장이 도심에 공공성을 자연스럽게 구현한 예시가 아닌가라고 생각해요.

이호

돌아보면 정림건축 디자인위원회 시간에 가장 자주 하는 말도 땅과의 관계인 것 같아요. 건축물의 배치, 땅을 쓰는 방식에서 주변과의 조화를 늘 추구하죠. 이게 정림건축이 공공성을 대하는 태도 같아요. 제가 이대서울병원 프로젝트 설계에 참여할 당시 증축 부지를 어디로 둘지가 첨예한 이슈였는데 정림건축은 단번에 결정했어요. “앞을 열어줘야 하지 않겠나?”라고요. 당산동 생각공장에서도 도시를 단절시킬 만한 거대한 매스를 요구 받았지만 그것을 쪼개고 나누고 연결해 도시의 길을 만든 셈이잖아요. ‘우리가 설계한 건물로 이 도시를 완결 짓지 않겠다, 앞으로의 변화에 순응하겠다’는 태도를 잘 드러내는 사례였다고 생각해요.

정림 피플앤웍스 시리즈 『N.1 생각공장』에서 발췌

부산항 북항 마리나 설계팀 대담: 현상설계

부산의 해안선은 약 150km에 이른다. 도시 성장과 매립지 개발로 인한 변화를 겪으며 대부분은 공업 및 상업 지구가 차지하고 있지만, 한편으로 녹지, 주거, 해수욕장, 친수 시설 등으로 조성되어 있기도 하다. 마리나가 들어설 대지의 해안선은 길이 1.5km에 달한다. ‘공공 시설’로서 주어지는 해안은 부산 전체 해안선의 1%에 불과한 셈이었다. 설계팀은 공공에 주어지는 해안의 희소성에 주목했다.

일시. 2023년 8월 9일 13:00 – 14:00
참석. 박재완, 천지혜, 오정택, 정주현, 김기룡
진행. 장혜인

1. 브레인스토밍 티타임
2. 계획 단계 보고서 분석
3. 대지 방문기
4. 실현되기 전의 건물을 전달하는 방법
5. 마치며
2018년 10월 제출한 부산항 북항 마리나 건립공사 설계공모안 설계 설명서
부산 시민과 대중에게 “공공을 위한 1퍼센트”의 해안을 마리나 시설로써, “해상 공원을 선물하겠다”는 모토로 작성되었다. ‘호안을 들어올리’는 디자인으로 매립지가 지닌 형태를 반영하면서 부산의 건축적 지형 및 랜드마크와 어우러질 수 있는 점진적 수평성이 특징이다.

브레인스토밍 티타임

천지혜

오전 티타임 이야기부터 시작하면 될 것 같아요. 이걸 보시면 되게 재밌어요. 저는 “브레인스토밍”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기억 나세요? 6~7월에 세 분이서 진행하시다가 8월에 저와 (박)영빈이 합류하고, 그다음 (김)기룡이 합류했죠.

박재완

처음에 팀원 세 명이었을 때, 아침에 출근하면 가운데 A3 종이 깔아두고 둘러앉아서, 자기가 관심 있게 봤거나 좋아하는 이미지를 서로 나누면서 서로 수다 떠는 시간을 보냈었어요. 이미지는 이 프로젝트와 관계 있어도 되고, 없어도 돼요. 그러면서 나왔던 좋은 이야기들이 이후 과정에서 빛을 발하기도 했죠. 팀원들도 서로의 성향을 자연스럽게 알아갈 수 있었고요.

정주현

매일 아침 9시였죠. (웃음) 프로젝트 팀마다 회의 테이블이 하나씩 있었어서, 모니터에 사진 하나씩 띄우면서 티타임을 가진 거죠. A3 종이 뭉치에 (박재완) 소장님이 ‘이런 얘기들을 했었지’ 하시면서 그리고 또 쓰시고, 그렇게 남은 기록들을 스캔도 해 두었었어요.
사실, 저희는 그 이미지들을 업무 도중에 따로 준비해가야 했어요. 하루 일과 다 마치고 나면 ‘맞다, 그거 해야지’. (웃음) 왜냐면 마침 주 52시간 근무제가 시작된 시기였거든요. 야근하는 요일을 정해두는 등으로 시간 내 업무를 마칠 수 있도록 (박)재완 님께서 저희 일정을 조절해 주시던 때였어요. 당시에는 둘을 병행하기가 조금 힘들었는데, 나중에 보니 그 시간이 저희로 하여금 계속 생각을 하게 만들어준 동력이었더라고요. 어찌 보면 회사에서는 내게 주어진 일만 할 수도 있잖아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리프레시하면서, 또 다른 아이디어가 나올지 재완 님이 질문을 계속 건네주신 셈이에요.

장혜인

재밌었겠네요. 그렇게 다같이 모여서 말랑말랑한 이야기들 톡톡 나누는 중에 좋은 게 많이 나오잖아요.

박재완

티타임을 만든 건 개인적인 경험 두 가지가 합쳐진 것인데요. 하나는, 파리에서 아틀리에를 다닐 적에 점심 먹으러 가면 식탁에 놓인 종이에 스케치하면서 프로젝트 얘기를 계속했었어요. 그럼 그 스케치 그대로 사무실에 가져와 도면으로 옮기곤 했죠. 다른 하나는, 학생일 때 프랑스 건축사회 회장을 역임했던 교수님 수업에서였어요. 그분은 학생들에게 일주일 간 작업한 것을 A3에 갖고 오라고 하셨었는데, 우리 발표를 들으시면서 그 A3를 한 장씩 넘겨보시다가 ‘이건 왜 디벨롭이 안 됐니? 여기에는 왜 이 이야기가 빠져있지?’ 내지는 ‘이 아이디어는 너무 좋은데?’ 등으로 크리틱을 주고받는 방식이었죠. 그러면 일주일 간 쌓인 작업 중 가치 있는 아이디어들이 빛을 보게 돼요. 거꾸로 말하면, 좋은 생각들을 발전시킬 기회가 없을 뻔했다는 뜻이기도 해요. 우리 팀원들의 좋은 생각들도 그런 식으로 꺼내어 프로젝트에 반영하고 싶었어요. 아침에 커피도 마시면서. (웃음)

오정택

현상 설계 하면서 제일 곤란해지는 경우가, 각자 대안을 내다 보면 기준이 따로 없어서 취사선택이 필요할 때 무엇이 좋다, 나쁘다고 뚜렷하게 말하기 어려워질 때예요. 모두가 자기 대안의 좋은 점을 이야기하니까요. ‘함께 만들고 합의한 방향성에 따라 이것·이것·이것은 기준이니, 그에 따른 대안을 내자’고 진행하면서 무엇이 더 타당하고 가능한지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던 게 좋았어요. 이러한 논의 구조나 콘셉트화 프로세스를 확립해 주신 것이 제게는 새로운 경험이었어요. ‘나도 나중에 이렇게 해봐야겠다’는 생각도 많이 했고요.

박재완

공동의 지식들로 합의된 설계 콘셉트가 나오길 바랐어요. 어느 한 명이 주도하거나, 각자가 땅에 대해 갖는 생각을 제각기 콘셉트화할 수도 있겠지만 아침마다 브레인스토밍을 통해 만들어진 공감대에서 비롯한 밑그림을 먼저 그려 나가기 시작한 거죠. 설계 대안들 역시 그 바탕에서 여러 가지가 나올 수 있도록요. 시간적 여유만 있다면 현상 설계 때 그런 과정을 거치는 게 좋은 것 같아요.

천지혜

요즘은 현상 설계 준비 기간이 보통 길어도 3~4주인데, 부산 북항 마리나는 6월에 일반 현상 공모가 나왔고 10월에 제출이었으니 주어진 기간이 100~120일 여 정도였어요. 마리나란 무엇인지 이해하고 항만 관련 용어를 알아가는 시간도 필요했다 보니… 그런 프로세스가 도움이 됐죠.

정주현

맞아요. 계류 시설은 뭔지, 그걸 설계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 그때는 전혀 몰랐으니까요. 국내에는 이렇다 할 만큼 좋은 마리나 시설이 많이 없기도 했고, 책을 구해서 보아도 정보가 자세하지만은 않더라고요. 해외 사례들도 참고하면서 공부를 많이 했었어요.

오정택

오히려 몰랐기 때문에 이런 프로세스가 유리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조심스럽게 ‘최대한 분석해 보면서 가자’는 방향이 유효했던 면도 있었을 것 같고, 잘 아는 프로그램이었다면 오히려 과정이 달랐을지도 모르겠어요.

박재완

(정)주현 님 말대로 프로그램을 알아가는 단계이기도 했고, 더욱이 시설의 기능이 분명히 작동해야 하는 특성이 있으니 어떤 추상적인 콘셉트 안에 원하는 대로 기능을 배치할 수는 없는 상황이잖아요. 이를테면 지상에 요트를 보관하는 육상 적층 시설은 마리나에서 면적을 가장 많이 차지하는 시설인데, 이것의 배치에 따른 대안을 고민했던 시기가 있어요. 대지 앞이냐, 중간이냐, 끝이냐. 그 위치에 따라 전반적인 계획도 달라지는 상황이었죠. 그러한 평면적인 운영은 달라지더라도 합의된 관점에서 비롯한 하나의 주제를 이미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각기 다른 프로그램 배치가 적용되면서 만들어질 수 있었어요.

계획 단계 보고서 분석

천지혜

마리나 기본 계획안은 현상 설계 이전 예비 검토안으로써 2011년도부터 작성되어 왔어요. 1차 안은 2011년 한국종합건축사사무소에서, 2차 안은 2013년 건일엔지니어링에서, 이후 행림+상지와 한종+건일처럼 컨소시엄 간 경쟁 구도로 작성된 안들도 있었고요. 이외에도 재개발 단지로 지정되고 마리나 건립이 확정되면서 지속적으로 갱신 검토된 버전의 보고서들이 존재해요. 얼마나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고민한 땅이었는지 실감이 되죠. 그간의 데이터를 통해 발주처가 이 땅을 어떻게 인지해 왔는지 읽어내고자 했어요.

오정택

그동안 작성된 계획안과 보고서들로부터 핵심 개념과 키워드, 콘셉트, 이를 위한 접근 방식 등을 파악해 범주화하고 분류했어요. 보고서 각 차수마다 유의미한 주제를 추출하면서 연속해서 강조되던 것들, 결국 공통적으로 호명되던 개념들을 세 가지 정도 뽑아볼 수 있었어요. 한편으로 앞선 보고서에는 없었다가 새롭게 등장한 내용들도, 근래에 필요성을 느낀 의견이 반영된 것으로 보고 주목하기도 했고요.

장혜인

1차 때 세모, 2차 때 동그라미 등으로 표기가 되어 있네요. 설계에서 적용하면 좋겠다 싶은 것들을 골라 놓으신 건가요?

오정택

적용도 적용이지만, 우리는 현상 안에서 무엇에 비중을 둘 것이며 상대 사는 무얼 중요하게 생각할지 파악하기 위함이 더 컸어요. 우리는 네모가 중요한 한편 그쪽은 동그라미를 좋아할 수 있잖아요. 그렇다면 왜 그러할지, 1~4차에 걸쳐 남의 생각 읽기를 한번 해 본 거예요.

천지혜

그런 측면에서 상대 사가 해올 것 같은 배치나 설계를 시도해 보기도 했어요. 그래야 미리 단점을 파악해 전략적으로 공격할 수도 있으니까요. RFP에서 가져온 키워드도 많아요. 이는 설계에 고려할 요소들을 추출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RFP는 곧 발주처의 언어이기도 해요. 심사 기준에 따라 채점하기 위해서든, 제출된 자료를 검토하기 위해서든 읽는 입장에서라면 같은 언어로 쓰인 자료가 보다 친숙하겠죠.
이상의 분석 작업은 정택 님이 거의 다 해 두셨던 거예요. 저는 나중에 합류했다 보니, 이렇게 다 모아두신 내용 덕분에 단기간에 프로젝트를 파악하기 좋았어요.

대지 방문기

부산항 북항 마리나 초기 부지 모습 ⓒ 오정택

오정택

이 사진은, 프로젝트 시작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인데요.

박재완

주현이랑 나랑,

오정택

네, 저까지 셋이서. 초기 부지 모습이에요. 당시 호안 형태 만드는 작업, 방파제 설치 작업 등이 진행되던 중이었어요. 위성 지도로 먼저 확인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도착했는데, 막상 보니 입구부터 부지까지 들어가는 깊이가 어마어마하더라고요. 때마침 날짜도 7월 22일, 한창 더웠을 때였죠. 셋이서 한여름 뙤약볕에 피부 태워가며 걷고 있자니 신호수 아주머니께서 ‘차 없이 그냥 걸어가느냐’고 걱정 어린 인사를 건네시더라고요. (웃음) 체력이 다 떨어져가던 찰나 부지에 겨우 도착했고, 그 거리감이 상당히 와 닿았어요. 이 지점에서 저기로 가려면 얼마나 들어가야 하고, 저쪽으로 가려면 또 얼마… ‘이곳은 어디서부터 몇 퍼센트 지점’이라는 감각을 체감했던 거죠. 몸은 고되었어도 수확이 많았던 답사였어요. 설계하는 내내 그 느낌을 갖고 갈 수 있었고, 특히 진입부 설계에는 재개발 단지 전경이 극적으로 드러나는 기대감을 반영하기도 했어요.

김기룡

저는 현상 도중에 합류한 팀원이라, 휴가 중에 혼자 대지를 방문했었어요. 비 오는 날이었는데, 그 일대에서 제일 높은 건물이 국제여객터미널이라 우산을 쓴 채 옥상에 올라 둘러보았죠. 회사에서 프로젝트를 할 때면 대지 주변에 고층 건물들이 들어선 경우가 잦은데 이곳은 아직 개발 중인 단지였기 때문에 사방이 트인 공간감이 좋았어요. 물류 시설이 많아 바다 건너 크레인이 움직이는 산업 도시의 풍광도 보이고 있었고요. 우리의 마리나는 이곳에 어떤 모습으로 들어서야 가장 합리적일지, 그리고 사람들도 많이 이용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며 돌아왔던 기억이 나요.

장혜인

사이트 분석 끝에 이곳을 “1%의 가치”라 함축하신 키워드가 개인적으로 재밌었어요. 마침 숫자도 공교롭고, 그것을 공공에게 돌려주자는 이야기도 인상적이었고요.

오정택

부산의 지역사를 조사하던 중 ‘부산에서 바다를 보러 갈 만한 장소는 잘 없는 것 같다’는 이야기가 나왔었어요. 부산은 6.25 전쟁 이후 도시화가 급격히 진행되면서 산지에 주거가 조성되고, 생업을 위한 산업 시설은 해안가에 형성되었어요. 그러다 보니 바닷가를 영유하기보다 활용하는 프로그램이 많아졌죠. 그래서 부산에 바다가 있다지만, 정작 부산 사람들은 이를 얼마큼이나 ‘우리 바다’라 가까이 느끼며 지낼까 싶었던 거죠.
이야기에 공감하면서 정보를 추적해보니 실제로 해변에서 바다를 향유할 만한 시설은 극히 드물었고, 그 드문 경우조차도 모두 자본을 보유한 기업과 개인이 차지하고 있던 게 현실이었죠. 그래서 시민들에게 ‘열려’ 있는 바다의 희소성이 매우 높다는 결론에 이르렀어요. 그래도 그렇지, 설마 1%일 줄은요. (웃음) 부산의 해안선 길이가 약 150km에 달하는데 저희 대지의 호안선 길이를 재 봤더니 1.5km 가량 되었어요. 정말 100분의 1이더라고요.

박재완

부산에 한동안 살았을 때, 해안가를 따라 차를 달려봐도 바다를 볼 데가 마땅히 없었던 경험이 있어요. 해수욕장에는 상업 시설이 즐비해 있고, 아니면 콘도나 호텔을 가야 하죠. 산에 오르거나 모래사장에 눕지 않는 이상 아무런 ‘체크 인’ 없이 바다를 접할 만한 시설은 매우 한정적이에요. 현상 설계인 만큼 이를 수치로도 표현해보면 좋겠다며 계산해 보니 그렇게 나왔죠. 마리나에 공공성이 필요한 배경을 나타내는 키워드였어요.

실현되기 전의 건물을 전달하는 방법

박재완

일전에 부산 공동어시장 현상 공모 참여하면서, 부산에서는 조형이 과격한 설계안이 자주 당선된다는 특징을 알게 되었었어요. 지역 설계사로서 협업했던 ING도 ‘형태가 무조건 세야죠!’라고 조언하셨었고요. (웃음) 다만 우리 단지에는 화려한 오페라 하우스가 지어질 예정이고, 팀원간의 논의를 통해 공공성이라는 화두에 다다랐던 만큼 형태적으로 자웅을 겨루고 싶지는 않았어요. ‘오페라 하우스라는 멋진 배우가 무대에서 연기하고 있다면, 마리나는 이를 객석처럼 받아주면 어떨까’라는 아이디어가 나왔고, 이는 테라스 형태를 띤 매스로 발전되었어요. 오브제와 조화를 이루는 모습 그 자체로 상징symbol이 되고자 했던 거예요. 이런 생각들이 다름 아닌 그 아침 회의에서 나온 거예요. (웃음) 길다란 모습을 부각시키는 모형을 만들었던 것도 그러한 조형적 메타포를 일정 부분 상쇄하기 위한 차원이었어요. 현상 설계에서 길이 2m짜리 단면 모형 만들기가 쉽지 않은데, 기룡 님과 영빈 님이 고생 많이 했죠. 중간 설계 때 한 층이 더 높아지게 되어 조금 아쉽지만요.

김기룡

(멋쩍은 웃음) 보조하는 분도 계셨는걸요. 그때는 열심히 만들기도 했지만, 동료들 모두가 정말 순수한 열정을 갖고 몰입해서 일한다는 걸 깊이 느꼈어요. ‘이 일은 진짜 긴장감을 갖고서 나 아닌 타인을 위해 열정적으로 해야 하는구나’, 그런 업의 본질을 많이 생각하게 된 계기였어요. 매일의 업무 수행을 넘어, 우리가 해낸 일이 나중에 어떠한 파급력을 가질 것이며 이를 설득하기 위한 시나리오들까지도요. 당시에는 ‘모르긴 몰라도 무언가 있겠구나’라는 막연한 확신이 있었어요. 돌이켜 봐도 정말 그렇고요.

정주현

질문지에서 ‘실현되기 전 건물을 전달하는 방법’을 물으셨는데, 저희 안을 잘 드러내 줬던 게 그런 모형이었다고 생각해요. 단면 모형과 콘셉트 모형, 그 두 가지요. 현상 설계안 제출 보고서도 마찬가지였어요. 쪽수가 정해져 있었고 흑백으로 제출하라는 작성 조건도 있어서, 어떻게 안을 효과적으로 보여줄지 저희끼리 정말 많이 고민했었어요. 표현기법 측면에서 그래픽 디자인 사례들을 여럿 참고하기도 하고, 쪽수가 모자라면 보고서 간지까지 알차게 사용하는 등으로 아이디어를 낼 수 있었죠.

마치며

오정택

저는 현상 설계 동안의 프로세스가 정말 좋았어요. 재완 님께서 ‘스텝 바이 스텝으로 좋은 것들을 잘 밟아나가보자, 무작정 그리기보다 분석을 하고 나서 그려보자’며 단계별로 명확하게 아이디어를 발전시키는 방법들을 토의하며 진행한 과정이 기억에 남아요. 결과적으로 여유 있게 진행될 수 있었던 현상이었어요.

박재완

DP로서 제가 좋았던 것은, 저 포함해서 우리 팀원 누구 하나 소외되는 사람이 없어서 좋았어요. 누군가가 콘셉트를 주도하고 그에 따라 역할이 나뉘는 일 없이요. 분업은 필요한 게 맞는데, ‘나는? 나는 뭐 아이디어 없는 줄 알아?!’ (일동 웃음) 하고 누군가 쀼루퉁할 일이 없었다는 뜻이에요. 하나의 주제 아래 저마다의 아이디어와 다양한 안들을 나누며, 모두가 주인 의식을 가지고 참여할 수 있었다는 점을 저는 가장 높이 사요. 특히나 현상 설계였던 만큼 더더욱요.

김기룡

얼마 전에 준공 사진을 조금 받아봤는데, 건물이 가진 각각의 면들이 주변에 잘 대응하면서 하나의 풍경에 녹아든 모습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최근 고향에 다녀오면서 한 번 들르고 싶었는데 아직 자잘한 공사 중이어서 가볼 순 없었거든요. 설계한 지 벌써 5년이 지났는데, 그때의 안목과 식견들이 어떤 그림으로 발휘되었을지 궁금해요. 나중에 시간 내서 꼭 다시 방문해보려고요.

정림 피플앤웍스 시리즈 『N.2 부산항 북항 마리나』에서 발췌

천지혜. 2008년 정림건축에 입사했다. 일산 요진 와이시티 복합개발, 리비아 트리폴리 워터프론트 개발, 영종하늘도시 오피스텔 신축설계, 용인 SK아카데미 마스터플랜 및 리모델링에 참여 또는 진행 중이다. 부산항 북항 마리나 현상 설계, 본 설계 용역. 디자인 감리까지 TL(team leader)로 참여했다.
박재완. 프랑스 빠리-벨빌 국립건축학교에서 도시계획과 건축설계를 배우고 2007년 정림건축에 입사했다. 현대해상 하이비전센터, 아모레퍼시픽뷰티 제2사업장, SK기념관 등을 수행했으며 한국건축문화대상 대통령상(2017), 한국건축가협회 BEST 7 협회상(2017) 등을 수상했다. 부산항 북항 마리나 프로젝트에서는 현상 설계부터 현장 디자인 감리에 이르는 전 과정에 참여했으며, DP(design principal)로서 디자인과 기술적인 부분을 주로 담당했다.
정주현. 2017년 정림건축에 입사했다. 대구은행 본점 리모델링, SK기념관, 시화 MTV 수변상업시설, SK실트론 복지동 등의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부산항 북항 마리나 프로젝트 당시 현상 설계 단계에 참여해 계획안 작성 및 보고서 작업, 계류 시설 설계 검토 등을 담당했다.
오정택. 2014년 정림건축에 입사, 부산항 북항 마리나를 비롯해 SK기념관, 삼성전자 메가스토어 대전 본점 등을 수행했다. 부산항 북항 마리나 프로젝트 당시 현상 설계부터 중간 설계 마무리 단계까지 참여했다. 현재 플로르건축사사무소를 운영 중이다.
김기룡. 2018년 정림건축에 입사했다. SK하이닉스 이천 M16 설계용역, 강남역 복합환승센터 연계 공간 설계, SK케미칼 사무동 신축설계, 안면도 꽃지지구 호텔 리조트 개발 사업에 참여했다. 부산항 북항 마리나 현상 설계 제안서의 보고 내용 작성 및 모형 제작을 담당했다.

들어가며

소개 부탁드립니다.

생각공장 신축 프로젝트에서 DP(design principle) 역할을 맡은 18년차 김동관입니다. 창원한마음병원, 워커힐 리버파크, 경기도의료원 안성병원, 신안경찰서 등 다양한 규모에서 여러 용도의 건축물을 설계했습니다. 장소성을 담은 건축을 지향합니다. 주변과 관계를 잘 맺는 건물이라면 오랜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사랑 받으며 그곳에 자리매김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생각공장 프로젝트에서 어떤 역할을 맡았나요?

현상설계공모 때부터 DP로서 프로젝트 디자이너 역할을 했습니다. 매주 클라이언트 협의와 브리핑을 진행했고요.

생각공장 당산의 디자인 요소

지식산업센터라는 유형 특성상 건축가가 디자인적으로 개입할 여지가 적습니다. 이때 정림건축은 ‘디자인’을 어떠한 관점으로 접근했는지 궁금합니다.

지식산업센터는 다층형 집합건축물로 각각의 실을 분양합니다. 그러니 아파트의 주호처럼 규격화한 실을 오차 없이 구현하는 것이 중요하죠. 그 논리에서 설계사무소의 역할은 입주사들이 쾌적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구현하고 지역 주민에게 환대 받는 제안을 만드는 데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희는 저층부에 보다 집중했어요. 사무실로 채워진 상층부는 클라이언트가 사업적으로 판단한 면적과 호수에 따르되, 주민과 입주사들이 다 함께 오가는 저층부는 도시와의 관계를 만들고 이벤트가 벌어지고 사람간의 교류가 일어나는 장을 만들자고 생각했죠. 쉽게 말해 저희는 저층부에서 디자인 승부를 보자고 생각한 셈입니다.

그러한 생각이 선큰 광장으로 드러난 건가요?

시작은 클라이언트의 제안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상가의 분양가는 층수에 크게 영향을 받습니다. 예를 들면 1층 상가의 임대료가 100만원일 때 2층 상가는 50만 원인 식이죠. 그런 이유에서 클라이언트는 1~2층 전체 면적을 상가로 두고 싶다고 말씀하셨고, 이에 저희는 동의하면서 공용 로비를 선큰 광장으로 진입하는 지하 1층에 두자고 제안했습니다. 물론 공용 로비를 지하에 배치한 전례가 없는 지라 계획설계, 실시설계 단계에서 클라이언트의 의구심이 커졌습니다만 이때 저희는 오히려 확신을 갖고 편안하고 쾌적한 지하 공간을 만들기 위해 더 신경 썼던 기억이 납니다.
실은 비화가 하나 있습니다. 건물 배치를 스터디하던 단계의 일인데요. 건물 덩어리들의 규모나 배치 등은 어느 정도 정해진 상태였고, 여기에 설계팀은 ‘도시에 새로운 길을 만들어 사람들을 끌어들여보자’는 아이디어를 모으고 있었죠. (윤)나예 님에게 대지에 들어가는 길을 모형으로 만들어달라고 했는데, 경사로를 만들어 온 거예요. ‘어라, 경사를 두라고 한 적은 없었는데’ 했더니 ‘아, 저는 만드는 줄 알고…. 그런데 이게 더 좋지 않나요? 그 길에 이렇게 경사가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요’ 하면서 이야기가 점차 발전되었어요. 참 우연찮은 일이었죠. 선큰의 가장 최초는 거기서 시작됐습니다.

그랬군요. 지식산업센터의 새로운 유형을 만들고 싶었던 건가요?

우선은 클라이언트와 정림건축 모두 지식산업센터를 효율성, 가성비로만 판단하던 시대가 지났다는 데에 동의했거든요. 그래서 ‘사옥’처럼 만들고자 했습니다. 개별 입주사들에게 자긍심이 될 만한, 오래 머물고 싶은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앞서 말했듯 ‘길’이라는 콘셉트도 이 건물이 자아내는 풍경에 사람들이 자연히 이끌리길 바란 목적에서 비롯되었고요. 그에 걸맞은 건축적 이벤트를 유발할 장치로서 선큰 광장이, 그리고 지상층 상가들 앞에 지그재그로 낸 포켓 공간 등이 설계되었던 것입니다.
더불어, 적재적소에 적당한 투자로 전체 퀄리티를 높이는 데에 집중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투자란 공용 로비에 마련한 라운지, 지상 1층의 바닥 타일과 외장 디자인 블록 등이라 할 수 있겠어요. 기존 지식산업센터에서는 저렴하게, 최소한으로만 구현했던 요소들에 품격을 찾아준 셈이죠. 듀플렉스 타입 호수도 처음 예상한 개수보다 늘리자고 해 고객의 선택지를 더 만들었습니다. 이건 모델하우스를 짓기 전에 90% 분양 완료를 기록했다고 들었습니다.

도시를 마주하는 태도

입면 디자인에서는 어떤 태도를 취했나요?

일명 “wet & dry”라는 디자인 콘셉트를 취했는데요. 1층부터 4층까지는 디자인 블록이라는 콘크리트 벽돌을 치장쌓기하면서 수평선이 강조되는 디자인으로, 5층부터 시작되는 상층부 업무시설은 컬러 로이 실버유리와 간결한 루버 디자인으로 단순하게 마감했습니다. 이미 번잡한 도심 풍경에 또 다른 얼굴을 내밀고 싶지 않았습니다. 대신 지하 1층은 로비와 상가인 1~2층, 지식산업센터를 지원하는 업무시설인 3~4층은 투명 로이 유리와 다른 루버 간격으로 구분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혹 이곳을 유심히 관찰하셨다면, 기부채납시설인 어린이 도서관 입면에도 동일한 마감재가 사용된 것을 발견하셨을 겁니다. 도서관이자 복지시설로서 필요한 차폐와 개방성을 각 면에 따라 적절히 채택하면서, 생각공장과 같은 대지에 놓여 연속성을 지닌 건물임을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생각공장은 연면적 10만㎡에 가까운 규모인 만큼, 이 당산동 도심에 어떻게 들어서게 할지 그리고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도 고민이 되셨을 듯합니다.  

맞습니다. 길 건너 인접한 아파트들과 비슷한 높이의 15층 건물이고, 휴먼 스케일에 비하면 아무래도 물리적으로 압도될 만한 규모니까요. 설계에 참고했던 레퍼런스들 가운데 용산 아모레 퍼시픽 본사 사옥이 있었는데, 그와 같이 당산동 일대를 산책하면서 언뜻언뜻 비치는 정도로 눈에 띄었으면 했습니다. 입면 디자인에서 말씀드렸듯 개성을 크게 드러내지 않는 깨끗한 얼굴로 충분하다고 생각했고요.
부지 외곽 가까이에 건물들을 두어 채광이나 환기가 원활하도록 했고, 건물 중간중간 보이드를 냈어요. 건물을 뚫어놓은 듯한 이 빈 공간들 사이로 우리의 시야도 막힘없이 가로질러 나아갑니다. 어디에서 관찰하느냐에 따라 보이드의 크기도, 당산동이 바라다보이는 장면도 다 달라지죠. 더불어 보이드가 생겨난 자리마다 외부 테라스 공간까지 함께 조성해낼 수 있었고요. 도시와 건축에서 일어나는 시각적인 흐름과 동선을 존중하면서도 새로이 유도하는, ‘메가 스케일의 건물로서 지녀야 할 자세란 이래야 하지 않을까’ 하며 고민했던 설계였습니다.

현상설계 당선안과 다르게 구현된 점이 있다면 어디인가요? 그 이유도 궁금합니다.

대지를 가로지르는 길은 생각공장 프로젝트의 시작이자 끝으로서 일관되게 유지되었습니다만, 지하 1층에 공용 로비를 두며 길과 로비가 만나는 교차점이 생겼지요. 엘리베이터 코어와 중간설계가 변경이 됐고요. 대지를 관통하는 선큰이란 개념은 약해졌지만 건축물의 기능성과 로비 인지성은 높아졌다고 생각합니다.

팀으로 설계하기

DP로서 팀원과의 소통을 할 때 신경 썼던 점이 궁금합니다.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한 태도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저희는 매주 수요일 판교에서 클라이언트와 주간회의가 있었는데요. 사무실로 복귀하는 버스 안에서 저는 그날 회의에 나왔던 아이디어를 정리하고 계획안에 반영해,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팀원들과 공유하려 했습니다. 만일 제가 사무실에 도착하고서 일을 시작하면 팀원들은 제 손만 바라보며 시간을 허비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매사에 제 역할을 신속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팀원들 역시 각자의 자리에서 그런 마음으로 프로젝트에 임했고요. 그 덕분인지 건축 심의, 허가 등 행정절차도 막힘 없이 술술 진행됐습니다. 보통 건축 심의 때 지적을 많이 받는데요, 저희는 “저대로만 지어달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정말 뿌듯했죠.

마지막으로 소회를 들려주세요.

2018년 추웠던 12월, 팀원들과 첫 현장답사 때 보았던 높은 담장과 적막했던 대지가 이제는 분주한 입주자들로 새로운 활기를 띠고 있는 모습이 신기합니다. 프로젝트는 이 장소에 들어서는 대규모 건축물이 가져야 할 자세와 주변 주거시설에 필요한 것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에 저희는 도시의 길을 대지로 끌어들여 주변 도시와 이웃이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을 그렸죠. 일단 그 뜻이 성공적으로 구현된 만큼 앞으로의 사용기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앞으로 생각공장이 도시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공간이자 길이 되길 바랍니다.
한편 3만 평이라는 대규모 프로젝트를 아이디어 제안부터 준공까지 잘 마무리 할 수 있어 기쁩니다. 사실 정림건축 같은 대형 건축설계사무소에서 개인이 이렇게 현상설계공모부터 준공까지 경험할 기회가 드뭅니다. 드러나지 않았지만 프로젝트를 위해 정림건축 내부적으로도 지원해준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적은 인원으로 시작해 클라이언트 TF팀과의 주간회의를 일 년이나 이어가면서 양측이 만족하는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는 점에서 함께 해준 우리 팀원들이 자랑스럽고 또 고맙습니다.

정림 피플앤웍스 시리즈 『N.1 생각공장』에서 발췌

김동관. 국민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건축설계를 전공했다. 2006년에 정림건축에 입사하여, 설계1그룹 선임TL을 맡아 근무했고, 현재(2025) 첨단설계부문 디자인 SU 리더로 재직 중이다. 대표작으로는 생각공장 당산, 창원한마음병원(2021 창원시 건축대상 대상), 경기도의료원 안성병원(2019 경기도 건축문화상 은상), 워커힐 리버파크 실내수영장, 고려대학교 첨단융복합의료센터, 신안경찰서 등이 있다.

설계팀 대담에 앞서

생각공장 당산은 현상설계공모부터 준공까지 한 팀으로 작업했던 이례적인 사례다. 프로젝트는 구성원 모두가 시작부터 끝까지 온전히 같은 목표를 향해 노력할 수 있는 프로젝트로 운영되었고, 구성원들은 각자 맡은 일이 뚜렷하면서도 팀으로서 시너지를 내기 위한 다양한 활동과 고민을 멈추지 않았다. 팀원 개개인은 아직 불완전한 건축가일지라도, 팀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각자가 자신의 역할을 100% 이상 수행한다면 더욱 값진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참석. 강석규, 김동관, 김정연, 오성종, 윤나예
진행. 박민호, 오가영
정리. 윤솔희

기억에 남는 순간

김동관

당산동 생각공장(이하 생각공장) 설계안을 작성하기까지 매주 클라이언트와 회의하고 안을 디벨롭했던 때가 생각납니다. 현상설계공모에 제안서를 낼 때, 설계도서를 납품할 때, 그리고 착공에 들어갈 때 매번 또 다른 힘듦이 시작되었던 것 같아요. 그럼에도 그 여정을 옆에서 함께 겪어나가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 정말 큰 힘이 되었습니다. 돌아보면 쉽지 않은 프로젝트였습니다. 분양 건물이라 예정 공사기간이 빠듯했고 프로젝트 규모에 비해 팀원이 많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지식산업센터라는 유형을 팀원 모두가 처음 접했던 와중에 그 유형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지하 선큰 광장이라는 실험에 도전했던 거예요. 팀원 각자가 자신의 역할을 다 해내지 못했다면 오늘의 모습을 보기 어려웠을 겁니다.

오성종

체력적으로 힘든 시간이었던 건 분명하지만 이렇게 무사히 준공 모습을 볼 수 있어 만족해요. 당시 4년차였던 (김)정연 님이 구조 도면을 단독으로 맡아 모두 작성했던 게 기억납니다. 처음에 잘해낼 수 있을지 옆에서 걱정도 많이 했는데, 정말 놀랐어요. 저연차에 선큰 광장 구조를 이해하며 전문가 수준의 도면을 작성해낸다는 건 제가 봐도 쉽지 않은 일이었거든요. 성명준 소장님과 협업하며 완성도를 높여 간 프로페셔널함에 감동했습니다.

김정연

구조 도면을 그릴 때는 어렵다, 아쉽다 그런 감상을 느낄 겨를도 없었던 것 같아요. (웃음) 현장 감리(CM) 역시 정림건축에서 맡아서 매 시기에 현장 사진을 받아볼 수 있었는데요. 한 층 한 층 올라가는 광경을 보며 ‘잘 지어지고 있구나’ 안도했던 순간이 떠올라요. (윤)나예 님은 어떠세요? 기억 나는 순간이 있어요?

윤나예

당산동 생각공장 프로젝트는 정림건축에 신입으로 입사해 맡은 첫 프로젝트였어요. 저는 특히 모형 제작을 담당했는데 지금 돌이켜봐도 얼마나 쉴 새 없이 많이 만들었던지, 프로젝트가 끝난 이후로 한동안 모형 만들기를 외면할 정도였습니다. (웃음) 전체적으로는 다른 팀원들을 서포트하는 역할이었는데 한편으로는 아쉽기도 해요. 이 프로젝트에 밀착해 기여하는 바가 부족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김동관

아뇨, 절대 그렇지 않았어요. 일례를 말해 볼게요. 생각공장 선큰 광장의 가로 폭이 18m인 것 모두 기억하시죠. 설계할 때 과연 이 정도 폭이 적정할지 확신하기 쉽지 않았어요. 스케치업 렌더링을 참고한다 해도 이는 오감이 아닌 시각에 의한 판단이 될 테니 계속 의심할 수밖에 없었죠. 이때 나예 님이 만들어준 모형들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데요. 모형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도시적 맥락에 순응하는 규모, 아름다운 비례, 실용적인 가능성 등을 발견한 것이지요. 저는 나예 님이 만들었던 단면 모형을 아직도 가지고 있어요. 그 모형 하나가 이 프로젝트를 다 설명해주거든요. 물론 신입사원으로서 여러 일을 조망하고 싶었을 것 같아요. 모형 제작뿐만 아니라 디자인, 디테일 연구 등의 역할을 아우르며 프로젝트를 배워가는 것은 아틀리에 운영방식에 가깝다면, 한 단계씩 업무 범위를 넓혀가는 정림건축의 방식은 전문성의 깊이를 더하기에 효과적이라고 생각해요.

강석규

이 프로젝트에서는 각자가 맡은 역할이 뚜렷했어요. 저는 입면도, 부분상세도 작성을 비롯해 도시계획시설을 담당했고 정연 님은 구조도, (오)성종 님은 평면도, 나예 님은 모형 제작, 보고서 작성 등을 맡아 모두가 마치 톱니바퀴처럼 움직였죠. 한 명이라도 아프면 큰일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빈 틈이 없었는데, 사실 이건 팀 운영 차원에서는 위험 요소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선큰 광장

김동관

맞아요. 강력한 팀워크는 시너지 효과를 내는 동시에 갈등에 취약할 때도 있거든요. 한 개동과 두 개동에 로비를 각각 두었던 안에서, 3개 동 전체를 위한 공용 로비를 선큰 광장에 두는 안으로 넘어가던 때에는 이견이 부딪히면서 가장 큰 위기가 왔던 시기예요. 클라이언트가 요청한 공용 로비란 건물을 방문하는 누구에게나 입주 업체가 “메인 로비로 오세요”라며 가리켜 소개할 수 있는 공간을 의미했어요. 팀원들은 그 메인 로비의 위치와 이유에 의문이 있었고, 사무실 분위기는 한동안 냉기가 감돌 정도로 싸늘했어요. 그 사이에서 절충점을 찾고 양측을 설득하는 게 제 역할이었는데 그 갈등을 해결할 실마리도 결국 디자인이었어요. 디자인 디벨롭(DD) 이후 이 냉랭한 긴장 상태는 한층 완화될 수 있었죠. 모두가 설계안에 대한 여러 의견과 제안을 경청하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클라이언트의 요청에 내포된 의미, 이 건물의 역할과 기능 등을 복합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오성종

현상설계공모 심사 당시 심사위원들 사이의 가장 큰 논쟁거리가 선큰 광장이었고, 정림건축의 설계안을 뽑은 이유 역시 선큰 광장이었다는 말이 기억나요. 경제성, 효율성만 쫓는 지식산업센터에서 이러한 디자인적 도전이 과연 유의미한지 아무래도 다들 고민했던 것 같아요. 선큰 광장이 그만큼 도시에 강력하게 말을 거는 파격적인 건축 어휘였던 건 분명해요.

강석규

결국 마지막에 TF팀과 임원 등 관계자들이 모여서 선큰 광장을 존치할지 말지 투표했었잖아요. 그때 유지하자는 의견이 과반수를 살짝 넘었던 것 같아요. 특히 젊은 분들이 좋아해주셨고요. (웃음) 당시 결정권을 가진 상무님이 저희 손을 들어주신 점도 컸지만요. 저는 사실 선큰 광장에 공용 로비를 삽입할 때만 해도 반신반의하던 입장이었어요. 모형과 렌더링을 보고 이야기를 거듭 나누며 공용 로비가 있는 디자인의 장점을 발견하기 시작한 것 같아요.

김동관

갑자기 생각났는데 건축 심의할 때 말이에요. 원래 설계사에서 한 명만 오라고 했는데 긴장되고 간절한 마음에 제가 (성)명준 님을 따라 들어갔어요. 심의위원들 앞에서 명준 님의 5분 발표가 있은 다음, 계획되지도 않은 시간을 비집고 끼어들어가 렌더링 영상과 CG 등을 보여주며 프레젠테이션을 이어갔단 말이죠. 그때 심의위원분들이 “저렇게만(계획안처럼만) 지어달라”라고 말씀해주셨어요. 시선 간섭 필름지만 잘 붙여두라면서요. 그때 우리 팀원들이 정말 자랑스러웠어요. 심의도 물론 무리 없이 단번에 통과했고요.

회의와 소통, 완성에 이르는 과정

오성종

건축 심의뿐만 아니라 그다음, 다다음 절차까지도 물흐르듯 흘렀잖아요. 클라이언트 사에서 저희랑 소통하던 설계 파트 담당자 분 말씀이 ‘모든 과정에서 이렇게 제동 없이 한 번에 간 적이 처음이었다고, 너무 좋았다’고 소회를 몇 번이고 밝혀주실 정도였어요. 일정 관리 면에서도 주간회의를 기준으로 일주일 루틴이 있었잖아요. 매주 수요일 주간회의를 마치고 칼퇴한 뒤 목, 금, 월요일은 야근하고, 회의 전날인 화요일은 상황에 따라 야근하면서요. 주말 출근 없이 주중에 열심히 일했던 것 같아요.

김동관

클라이언트인 SK D&D, 콘셉트사인 매니페스토와 매주 주간회의를 하니 얼마나 많은 안건과 제안, 수정과 결정이 있었겠어요. 이때 우리의 전략은 한마디로 ‘여러분이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수준의 프레젠테이션을 계속 보여주겠다’였어요. 정림건축의 전문성을 토대로 신뢰를 높이겠다는 의도였죠. 회의마다 그간의 사항을 업데이트하고 최대한 우리 관점과 목소리를 입혀 한 단계 높은 제안을 보여줬던 게 긍정적으로 작용했던 것 같아요.

오성종

저는 착공 이후부터 TL 역할을 맡게 되면서 현장과의 커뮤니케이션도 담당했는데, 클라이언트와 주고받은 메일들을 세어보니 1500통이 넘어가더라고요. 일주일에 거의 30통씩 쓴 셈이에요. 그렇게 촉박하게 진행되었던 과정 속에서 힘이 되었던 건 역시 팀원 모두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서포트해줬다는 점이에요. 정말 고마워요. 참, TL로서 좋았던 점이 또 하나가 매주 공사 현황 사진을 제일 먼저 받아서 단톡방에 함께 공유할 수 있었던 것이에요.

김동관

성종 님이 현장의 변화를 매번 신속하고 정확하게 팔로우업하지 않았다면 준공 모습도 많이 달라졌을 거예요. 보기에 두드러지지 않을지 몰라도 지식산업센터 유형에서 보지 못했던 도전이 많이 있거든요. 1층 바닥의 인조 대리석, 외장재인 벽돌, 유리, 루버, 난간 등의 사양, 색, 치수까지 무엇 하나 허투루 선택한 게 없어요. 이게 왜 중요하냐면 저층부 선큰 광장과 지하 1층의 공용 로비, 지상 1-2층의 상가가 곧 이 건물의 아이덴티티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도시와 관계 맺는 방식, 시민을 환대하는 태도, 생각공장 사용자를 위하는 배려가 이곳에 있어요. 그것도 클라이언트의 경제적인 지표를 동시에 충족하면서요. 디자인위원 답사를 갔을 때, 기현철 님의 첫 마디가 바로 “도시가 바뀌었네” 였어요. 이 얼마나 우리가 바라던 바인가요. 2018년 겨울 첫 답사에 느꼈던 동네 분위기를 떠올려 보세요. 높다란 담이 버티고 서 있던 골목이 휑하고 삭막했잖아요. 이제는 이 일대의 분위기가 바뀌었어요. 도시계획시설까지 있어 유용하고 소중한 시민 공간이 되었죠.

앞으로 생각공장 당산은

윤나예

2022년 가을 입주를 시작했으니 앞으로 사용자들이 상주하는 시간이 이곳에 쌓일 텐데요. 저희 계획대로 잘 사용된다면 정말 좋겠어요.

오성종

SK D&D가 몇 년 간 관리한다고 들었어요. 관리주체가 있으니까 사용자들 간의 질서와 규칙도 뿌리내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선큰 광장으로 사람을 끌어 모아 이용을 활성화하려던 생각이 도시의 공공성으로 확장되어 더욱 의미 있는 프로젝트였습니다.

김정연

제 기억에 처음 이곳 부지는 문래역, 영등포구청역과도 거리가 조금 있는 편이었고 인근에 아파트 단지와 학교가 있음에도 환경이 쾌적하지만은 않았어요. 이제 정돈된 유리 커튼월 건물과 모두의 마당으로 열린 선큰 광장으로 다시 탄생했으니 정말 일대 풍경이 달라질 것 같아요. 앞으로 펼쳐질 모습이 기대됩니다.

강석규

저도 이곳이 도심 속 작은 벤치 같은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지그재그로 난 1층 상가 테라스에 사람들이 머물다가 가고, 선큰 광장에 다양한 이벤트가 열리는 모습을 상상해요. 비워 둔 만큼 새로운 이야기로 가득 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김동관

준공 이후에 이렇게 소회를 나누고 피드백을 할 자리가 있어 참 좋습니다. 준공 프로젝트를 몇 개 경험해보니 프로젝트를 마치고 난 팀원들이 뿔뿔이 흩어져 홀로 남았을 때가 제일 우울하더라고요. (웃음) 2023년 여름 즈음 화창한 어느 날에 당산동에서 같이 점심 먹고 커피 한 잔 할까요? 사용자들이 어떻게 공간을 쓰는지도 보고요.

정림 피플앤웍스 시리즈 『N.1 생각공장』에서 발췌

김동관. 국민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건축설계를 전공했다. 2006년에 정림건축에 입사하여, 설계1그룹 선임TL을 맡아 근무했고, 현재(2025) 첨단설계부문 디자인 SU 리더로 재직 중이다. 대표작으로는 생각공장 당산, 창원한마음병원(2021 창원시 건축대상 대상), 경기도의료원 안성병원(2019 경기도 건축문화상 은상), 워커힐 리버파크 실내수영장, 고려대학교 첨단융복합의료센터, 신안경찰서 등이 있다.
오성종. 비드건축에서 8년간 실무를 익히고 2017년 정림건축에 입사했다. 서천 봄의 마을(2012 한국건축문화대상 대상), 진주 소진담(2018 진주시 건축대상) 등에 참여했으며 정림건축에서는 SK기념관, 생각공장 당산 등을 수행했다. 생각공장 당산 당시 기본 설계부터 준공 현장 지원까지 참여 및 진행했다.
김정연. 2017년 정림건축에 입사했다. 생각공장 당산을 비롯해 SK하이닉스 이천 연구개발센터, 삼일빌딩 리노베이션, 워커힐 리버파크 실내수영장, 인천터미널 복합개발, 아모레퍼시픽뷰티 제3사업장 등을 수행했다. 생각공장 당산 당시 중간 설계 인허가 과정부터 합류해 구조 파트를 담당했다.
윤나예. 2018년 정림건축에 입사했다. 정부세종신청사 국제설계공모(4등), 청라동 오피스텔 1, 2 신축설계, 청주 도시첨단 물류단지 개발사업 등을 수행했다. 생각공장 당산에서는 현상 설계부터 실시 설계에 이르는 전 과정에 참여했으며 보고서 및 도면 작성, 모형 제작 등을 주로 담당했다.
강석규. 2013년 정림건축에 입사했다. 이화여자대학교 마곡의료원 지명현상설계, 고려대학교 안암병원 메디컴플렉스 신관 등의 사내 주요 현상 설계 프로젝트와 생각공장 당산, SK케미칼 종합관리동 및 후생동 등의 준공작을 수행했다. 생각공장 당산 설계 당시 현상 설계부터 실시 설계까지 참여하며 외벽 상세도면 작성, 도시계획시설(도서관) 계획 및 설계를 담당했다.
정림건축의 디자인이란 ‘공통의 느낌’을 설계에 담기 위해 부단히 질문하고 토론하는 조직설계 문화에서 비롯한다. 이에 기반해 정림의 작업들은 다양한 시대상을 반영해 왔다. 정림 디자인은 고정되어있기보다 60여 년의 시간축을 따라 수렴하는 동시에 미래로 계속해서 확장해 가는 중이다. 디자인에 대한 인식의 확장과 전환이 필요한 지금, 다름 아닌 디자이너의 역할이 중요할 것이다. 특히 지속 가능한 세상을 위한 디자인을 위해서라면 더더욱.
일시. 2022년 2월 15일
인터뷰이. 기현철
인터뷰어. 박성태, 장혜인

턴키 시절 디자인 방법

정림에 입사하실 때 상황을 여쭤볼게요.

제가 대학 다닐 때에 정림은 최고의 설계사무소라는 인식이 있었어요. 졸업하고 바로 프랑스 유학을 갔다보니 머릿속에 그 기억과 명성이 남아있었지요. 베르나르 뷜러 아뜰리에에서 팀장으로 일하다 2008년 귀국해 이필훈 대표와 면접을 보고 입사했어요. 저는 프랑스에서 리모델링과 공동주택 프로젝트를 주로 수행했었고, 정림은 여타 국내 설계사무소들처럼 알제리를 비롯한 북아프리카 지역을 한창 사업지로 고려하던 때였어요. 그래서 주거본부와 해외사업본부에 지원했었는데 설계3본부에 PD(프로젝트 디자이너)가 없어서 3본부로 배정받았습니다. 당시 박종남 님이 본부장이셨어요. 2007년은 회사가 다소 어수선하던 시기였는데 국내 회사 경험은 정림이 처음이었다보니 ‘아, 원래 다들 이런 분위기인가보다’ 했었죠. (웃음)

변화가 크셨네요. 당시 한국 건축계는 턴키 방식의 일괄입찰이 대부분이라, 디자이너의 역할도 조금 달랐죠. 설계안을 리뷰할 때도 동료들에게 심사위원 역할이 부여되곤 했어요.

현상설계는 당선이 목표이니 심사 현장 시뮬레이션이 더 필요했던 거죠. 게다가 그때는 매트릭스를 짜서 알트를 만들었거든요. 예를 들어 심사에서 중요한 방향성 하나, 둘, 셋, 넷, 행을 만들고 설계 조건에 맞춰 디자인한 경우의 수 네 가지, 그러면 4*4 = 16가지 안을 내는 거지요. 건설사가 한눈에 보고 택하게 하려면 결국 이 안과 저 안의 장점을 섞어서 만들게 되어요. 다수가 동의할 수 있도록 너무 모나지도 너무 평범하지도 않은 안으로 절충되어 가는 과정을 차차 알게 되었고, 그렇게 이해하면서 생각을 바꾸는 과정이 한 3년 걸렸네요.

자세히는 모르지만 요즘은 많이 바뀐 것 같아요. 예전처럼 알트를 많이 만든다거나 DR과 TR을 열심히 하기보다 프로젝트 담당 디자이너에 권한을 더 부여하는 쪽으로요.

맞아요. 이제는 그렇게 진행하는 경향이 많이 줄었지요. 현재는 주 52시간 근무제가 도입되면서 알트를 많이 만들어내는 일은 여건상 불가능해졌고, 그만큼 TL과 프로젝트 팀이 디자인을 이끌어가요. 예전처럼 턴키로 촉발된 비효율적인 방식이 물론 좋지만은 않아요. 다만 공사비와 공기 등 모두 동일한 조건이었으니, 그 많은 알트들 가운데 하나의 안이 선택되는 기준만은 분명했어요. ‘디자인’, 즉 차별성 있는 계획안이었던 거지요. ‘턴키 디자인이 건축을 망쳐놓았다’는 평이 있듯 수준의 편차는 있어도 분명 화두의 중심에는 디자인이 있었어요. 턴키 시대가 좋았다는 뜻이 아니라, 디자인에 관한 소통과 관심을 점차 회복시킬 필요성이 있지 않나 합니다. 정림 같은 조직설계에서 유일한 소통 기회는 디자인 리뷰니까요.

정림건축의 디자인 정체성과 조직설계 방법론

올해(2022)부터 정림건축 디자인 책임자로서 일하기 시작하셨어요. 어떤 생각과 고민이 많이 드시나요?

아무래도 중심 화두는 정림 디자인 정체성과 조직설계 방법론이겠죠. 제 나름의 주관과 논리로 조직설계를 정의해본다면 ‘어떤 공통된 느낌을 가진 다양성’이라 생각해요. 이 다양성은 차이의 난립이 아니라 어느 정도 결이 비슷한 특성을 말해요. 건축에 관심 있는 분들과 바깥에서 건물들을 보다 보면 ‘저건 왠지 정림 설계 같은데’하는 감상을 종종 들어요. 어쩌면 그것이 정림에서 추구해온 조직설계의 원형이자 뿌리가 아닌가 합니다. 그렇다면 그 ‘공통의 느낌’은 무엇이며 어떻게 날카롭게 다듬어 가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어요.

경력 입사자들 중에는 그간 친숙했던 건물들이 정림 설계였던 사례들을 상당히 많이 알게 되었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아요. 건축가라면 공공을 우선하고 주변과의 조화, 컨텍스트의 반영 등을 강조하기 마련인데, 정림은 도시 생태계의 하나로서 건물이 존재하게끔 설계하는 감각이 탁월하다고 합니다.

그게 55년 간의 경험이고, 사람으로 따진다면 연륜인 거죠. 원숙한 건축가의 깊이와 연륜은 젊은이와 다르듯이 정림도 1967년에 시작된 회사인 만큼 이제는 원숙한 단계라 봅니다. 현재 정림과 비견되는 대형 설계사무소 대부분은 대규모 프로젝트를 턴키로 수행하던 90년대와 2000년대에 성장했습니다. 눈에 띄는 랜드마크와 상징성, 조형성과 파격성에 중점을 두던 시대였지요. 이들도 조직 단위로 설계하는 만큼 업무 방식이나 조직 체계를 비슷하게 두고 볼 수도 있겠지만, 사무소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와 비전은 전혀 다른 궤도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림에서 일하시면서 정림이 갖는 ‘공통의 느낌’을 실질적으로 느껴본 적 있으신가요?

그 요소들을 탐구하려던 시도가 작년 동안 게시판에 연재했던 〈발칙한 디자인 분석〉이에요. 여섯 가지 범주 즉 기능, 장식, 파사드, 공공성과 한국성, 컨텍스트 등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주된 흐름(main stream)이 있었고 이에 맞는 프로젝트들과 아이디어들을 보고자 했어요. 쉬운 예를 들어 동일한 연면적일 때 타워 하나를 짓는 방법과 건물동을 두세 개로 나누어 설계하는 방법이 있다면 정림은 가능한 한 전자를 택하려 들지 않아요. 건물과 건물이 만들어내는 사이 공간이 느껴지도록 매스들을 배치하는데 그 근본에는 휴먼 스케일, 컨텍스트와의 조화, 공공성에 대한 인식이 있는 거죠. 디자인으로 주변을 압도하기보다 좀 더 부드럽고 친화적으로 설계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사내 디자인 교육도 있었고, 소위 DP 제도로 디자이너 그룹을 형성해 선배와 후배, 엑스퍼트와 주니어가 함께 디자인 담론들을 만들어내려 했어요. 지금은 어떤 방식으로 이를 이끌어내고 싶으신지.

지난 해 연재한 디자인 이야기를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읽어주셨어요. 더 나아가 ‘저는 관점이 좀 다릅니다’라는 깊이 있는 토론까지 가려면 오프라인 모임이나 소규모 토크 등이 필요하지 않을까 해요. 그게 무거운 제도로 틀을 굳히고 강제해서 만들어질 것이라는 생각은 안 하고요. 그런 분위기나 문화가 자리 잡도록 활성화하는 장은 많이 만들려 해요. 시니어 내지 대표 디자이너들이 그룹별로 모여서 프로젝트 진행 상황과 이슈들, 현상설계와 클라이언트들의 요구사항 변화 등을 이야기 나누는 자리도 중요하다고 보고요.
더불어 주니어 디자이너들도 본인의 창작 기회와 재능을 발현할 수 있도록 사내 현상공모를 활성화하려 합니다. 신인 디자이너들을 포함한 정림 설계 인원 500여 명이 지닌 가능성을 발현시킬 수 있다면 개인에게도 회사에도 좋은 기회가 될 거예요. 마지막 사내 현상공모가 여수 엑스포(2012)였는데, 이 끊어진 맥을 다시 부활시키되 각 그룹과 개인들에게 너무 부담스럽지 않도록 저와 NID 본부(현 디자인기술 통합지원센터 SU)가 많이 노력하려 합니다. 디자이너 본인의 역량은 결국 교육보다 실전에서, 프로젝트를 통해 더욱 성장한다고 봅니다.

주요 프로젝트 1.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프로젝트 이야기들 여쭤볼게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하 역사박물관) 리모델링 작업에 참여하셨지요?

네. 역사박물관은 크게 세 단계가 있었어요. 처음 아이디어 현상설계 때는 백의현 님이 리딩하신 정림 안이 당선되었고, 이렇게 뽑힌 안들을 상대로 턴키 공모를 냈죠. 당시 이명박 대통령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던 시점에서 신속히 진행해야 했거든요. 아무튼 그런 턴키가 두 번째 단계였습니다.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연유는 프랑스에서 리모델링 작업 경험이 많았다는 점이었습니다.

중장기 발전 계획으로 제시한 안. 주한미국대사관이 이전하고 확장한 모습의 디자인이다. 실현되지는 못했으나 북측 의정부 터로 이어지는 브릿지, 박물관과 대사관 건물의 연속적인 입면 등이 특징이다. (2011 정림건축 연감집)

실시설계 진행하고 설계 자문위원들과 서울시와 협의하면서 업무 범위가 줄었지요. 의정부 터 방향으로 이어지는 브릿지를 통해 역사박물관과 작은 공원(광화문 시민열린마당)을 연결하고자 제안했는데 이 역시 제외하게 됐어요. 아쉬운 부분 중 하나예요. 설계 범위가 축소됨에 따라 입면도 좀더 단아하게, 유글래스(U-Glass)라는 재료를 활용한 안으로 정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기까지가 제 역할이었고, 이어 백의현 님이 실시설계하시고 김명진 님 TL로 완성하게 됐죠. 백의현 님이 시작해 제가 중간에 만들고 다시 백의현 님이 완성한 셈입니다.

중간 계투 역할이셨군요. 프로젝트 기간이 길어지면 여러 명이 참여하게 되는 구조가 대부분인 것 같아요.

호흡이 긴 대형 프로젝트라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고 봐요. 저 역시 프로젝트 상황과 규모에 따라 진행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고요. 우리 회사에는 10년이 넘어가는 프로젝트부터 깔끔하게 일년 내지 일년 반 안에 끝나는 프로젝트까지 있는데, 후자처럼 기간이 짧으면 처음 인원으로 마지막까지 가도록 하자는 의견들이 많아요. 주니어든 시니어든 본인이 주도할 수 있고, 실제 팀으로서 수행할 수 있는 프로젝트가 연속되어야 건축가로서 더욱 성장할 수 있다고 보거든요.

2012년 준공한 대한민국역사박물관과 세종대로 전경. 기존 콘크리트 구조체와 이격시켜 만든 입면에는 유글래스를 활용했다. 박물관은 창호지 같은 반투명한 질감으로 광화문광장과 경복궁이 자리한 도심을 온화하게 마주한다.

주요 프로젝트 2. 평창올림픽 개폐회식장

정림에서 디자인한 프로젝트 중에 ‘내 작업으로 손꼽을 만하다’, 생각하시는 게 있으시다면?

평창올림픽 개폐회식장이요. 올해 베이징 올림픽 했으니 딱 4년 지났네요. 전 세계 몇십 억 인구가 한 번은 보았을 만큼 상징성도 있고요. 평창올림픽 직전이 소치올림픽이었는데, 개폐회식장 베뉴(venue)가 역대 가장 화려했던 올림픽이라 비교되었을 뿐더러 예산이 절감되는 상황이라 굉장한 압박감이 있었어요. 여러 상황 속에서 고민했을 때 ‘가설 건물로 짓자, 끝나면 완전히 철거해서 대지 원형으로 돌아가도록 하자’는 생각에 다다랐습니다. 의자도 자연 경사를 이용해서 놓고, 바람은 가림막으로 막자. 예산이 풍족했더라도 아마 그렇게 했을 것 같아요.

평창올림픽 개폐회식장 준공 후의 모습과 경관조명을 받고 있는 외피의 PVC 메시

올림픽 경기장은 야간 경관이 중요해요. 개폐회식과 방송을 밤에 하니까요. 그러면 경관조명을 받은 건물은 마치 가수의 무대의상처럼 활용되어야 해요. 그러니까 이 건물의 기능은 조명을 잘 받은 모습으로 행사를 선보이는 거죠. 이를 위해 겉면에 PVC 메시를 이용했어요. 재질 자체에 미세하게 타공이 있어 은은하게 빛을 먹는 효과가 뛰어나죠. 바람이 거센 현장인 만큼 일대일 목업이 끄떡없는지 검증하는 기간도 몇 개월 간 거쳤고요. 공사장 가림막으로 흔히 이용되는 저렴한 소재라 비용도 상당 부분 절약하고 철거도 한결 쉬웠어요. 두루말이로 둘둘 말아 가져가면 되거든요. 화려해 보여도 검박하게 지은 건물입니다. 그렇다고 마구 지어올리지도 않았습니다. (웃음) 가설 건물일지라도 올림픽 개폐막식에 걸맞는 행사 프로토콜이나 IOC 규정을 다 맞춰야 합니다. 이를 위해 IOC에서 파견 나온 기술위원들과 워크샵을 다수 진행했었어요. 설계를 검증받고 다시 충족시켜가는 과정을 반복하느라 꽤나 복잡다단했던 기억이 납니다.

평면 계획이 사각형과 오각형, 두 가지가 있었어요.

원래는 사각형 계획이었어요. 양쪽에 스탠드를 두고, 뒷편 산지와 구릉에서 내려오는 경사를 따라 디귿자로 계획했지요. 철거하고 나면 원래의 고원훈련장 모습 그대로 쓸 수 있고 공사비 측면에서도 가장 심플한 구조였고요. 당시 연출을 맡았던 총감독이 ‘소치 때는 원형경기장으로 굉장히 화려했는데 이렇게 계획하면 감독으로서 연출의 폭이 좁아진다, 원형으로 해달라’는 의견을 주셨어요. 하지만 그러려면 대지를 다 밀어서 진짜 스타디움을 만들어야 되거든요. ‘취지와 맞지 않게 됩니다’, 하여 절충한 것이 오각형 평면이었습니다. 올림픽 오륜기의 ‘5’도 연상시키면서 땅의 경사도 활용할 수 있도록요. 저도 초기안을 더 좋아했었지만 감독의 입장 역시 충분히 이해했고요.

평창올림픽 개회식 모습

사실 오각형으로 계획해서 좋은 점이 있었어요. 개폐막식에서 시간이 가장 오래 걸리는 순서는 다름아닌 선수 입장이에요. 첫 번째 그리스로 시작해서 두 번째, 세 번째, … 마지막으로 남북한 단일 선수단, 이렇게 하나씩 입장해서 한 바퀴 돌고 퇴장해야 하거든요. 그런데 오각형으로 하고 났더니 출입구를 한 군데씩 더 뚫을 수 있게 되었어요. 두 국가가 양쪽에서 각각 동시에 입장해 한 바퀴를 같이 돌 수 있게 된 거죠. 시간도 반으로 줄고 겨울이라 추우니까 ‘그러면 본행사를 더 충실히 할 수 있겠구나, 그것 좋은 생각입니다’ 했었죠.

흥미로운 이야기예요. 올림픽 스타디움은 일련의 과정을 거친 공적 작업이지만 개막식과 폐막식만 치르니 건물의 화려한 부분 전부를 경기장으로 활용하지 못하잖아요. 철거가 가능한 가설 건물로 계획하신 것도, 올림픽이라는 대규모 행사가 치뤄지는 과정이 친환경적이지만은 않기에 더욱 의의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은 그러면 다 철거된 거지요?

다 철거됐어요. 아주 신속하고 깔끔하게. (웃음) 현재는 본관을 제외하면 대지 원형 그대로 남아있고요. 다행히도 올림픽 기간 동안 기후 조건도 그렇게 춥지 않았고, 지붕이 없는 덕분에 드론 비행과 같은 무대 연출도 가능했어요. 임시 건물이라 어떤 상을 받지는 못했지만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이 주목했었고 우리나라도 좋은 성적을 거두었던 올림픽이라, 제 기억 속에 남아있고 제게 가장 의미 있는 대표작입니다.

주요 프로젝트 3. LG ThinQ Home

어떻게 시작된 프로젝트인가요?

현상설계 당시에는 ‘미래주택’이라는 키워드만으로, 사업 의도를 명확히 전달받지 못했어요. LG하우시스와 LG전자가 함께 한다니 대량생산이 가능한 미래 주택 프로토타입을 만들어보자는 취지라고 판단했지요. 큐브 형태의 모듈로 여러 조합과 변형을 만드는 주택 시스템으로 구상했었어요. 현상에 당선되고 계획이 진행되면서 프로젝트 방향이 ‘에너지 세이빙’, ‘스마트 홈’으로 전환되었고 이에 따라 설계도 좀 달라졌지요. 제로에너지 주택 사례들에서도 보이듯 태양광은 지붕으로 받아들이는 면적이 압도적이라 평지붕보다 박공지붕일 때 더욱 유리할 수밖에요. 그리고 미래에는 도시도 인구도 과밀화되는 환경에 가까워질 텐데, 그럴수록 오히려 인간은 ‘집’ 하면 떠오르는 가장 자연스럽고 원초적인 모습을 원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집이라는 이미지로 가장 친근한 박공지붕 형태가 맞겠다고 판단했어요. 에너지 효율과 정서적 의미 모두를 충족하려 했습니다.

공간계획이나 평면에서 주목해서 볼 부분이 있다면요.

빌라 사보아는 르 코르뷔지에의 대표작이자 근대건축의 5원칙이 적용된 주택으로 중요하지만 실은 ‘집에 자동차를 들이자’는 조건에서 시작된 거예요. 미국에서는 포드가, 프랑스에서는 르노가 한참 만들어지고 있던 시기에 건축주 사보아도 마침 차를 샀고, 이 차를 집에 주차하고 싶었던 거예요. 따라서 필로티가 만들어지면서 주차장이 마련되었죠. 자동차라는 기술을 집으로 들이는 조건이 건축을 발전시킨 셈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에서, LG전자가 보유한 기술이 주거를 바꾼다면, 근대건축 5원칙을 2020년대로 불러온다면 무엇이 가능해질지 하나씩 비교해보았죠. 5원칙 중 하나인 ‘자유로운 평면’은 ‘키네틱 플랜’, 즉 움직이는 평면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벽체가 움직이면서 공간에 변화를 불러오는 거지요. 그래서 ‘스마트 월’이라는 이름의 움직이는 벽을 계획해 두었어요. 마침 LG전자에서 환기 장치나 TV를 내장한 벽체 모듈 자체를 제작해낸 상품도 있었고요.

ThinQ Home의 외관. LG와 정림건축에서 자체 개발한 BIPV 모듈이 적용되어 있다.

무엇보다 이 집은 외관도 중요해요. 주택의 외피를 이루는 푸른색 재료 전체가 BIPV인데요. 태양광 패널이 미관상 아쉬운 경우가 전부터 많았기 때문에 아예 건물의 외장재로 일체화시켰어요. LG전자와 정림이 하나하나 디자인하고 실험해서 제조한 모듈입니다. 생산부터 활용까지 가장 보편적인 타일 사이즈로 만들었어요. 그래서 더 큰 목표를 그려본다면 이것을 현장 어디서든 건축자재처럼, 보통의 타일을 쓰듯 상용화시키는 겁니다. 에너지 생산 측면에서도 PV 패널이 적정 크기를 지니면 에너지를 건물에 딱 필요한 만큼만 발전해낼 수 있으니 낭비가 없죠.

디자인 인식 확장과 전환

정림에서의 디자인, 정림의 디자이너란 우리의 여전한 숙제이자 뜨거운 감자인 듯해요. 앞으로 분위기와 문화를 만들어나가면서 프로젝트를 운영하는 시스템과 제도로도 현실적인 변화를 꾀하실 텐데요. 3년 후, 5년 후 정림의 모습에 대한 상이 있으시다면요.

저는 디자인에 대한 인식의 확장과 전환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영미권에서 디자인이란 건축의 상위 개념입니다. 건축, 어반 플래닝, 인테리어부터 랜드스케이프까지 모두를 디자인에 속한 행위로 규정하지요. 반면 유럽권 대부분은 건축의 예술적·조형적·감각적인 부분을 디자인이라 일컫기도 해요. 정림은 이 두 가지 생각을 다 갖고 있습니다. 어느 한 가지 흐름으로 규정짓기 어려운 지점이 여기서 비롯합니다. 정림 디자인을 정의하는 일, 건축가·디자이너 크레딧 등의 주제들이 현재 실타래처럼 꼬여있는 상황이라 봅니다.
예술적인 조형성이나 프로포션의 완성도, 양식과 스타일을 따지는 일은 구시대적인 인식입니다. 건축계에서도 건축 영웅과 거장들을 추앙하는 분위기에서 벗어나 사회와 환경을 고려하고 또 그에 기여하고 있는지를 우선하는 양상이 예민하게 드러나고 있어요. 프리츠커상 수상자 경향을 보더라도 2021년의 라카통 앤 바쌀(Lacaton & Vassal), 2018년의 발크리슈나 도시(Balkrishna Doshi)가 그렇지요. 미래가 건축가에게 기대하는 비전이자 디자인은 그런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 정림이 올해 기후위기 및 탄소절감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에 관한 화두를 꺼내기 시작한다는 건 매우 앞서나가는, 또 지향해야 할 관점이라 봅니다. 이것이 곧 ESG라는 표현으로 이야기되고 있지만 정말로 정림건축이, 건축 디자인 회사로서 의지를 갖고 실현할 수 있는 ESG 활용 방안에 집중한다면 그것이 가장 트렌디하면서도 가치 있는 정림 디자인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기현철. 1969년생. 현재(2025) 설계부문 디자인 기술 통합지원센터 SU 디자인파트 파트장. 고려대학교 건축공학과와 프랑스 보르도 국립건축조경학교(ENSAP Bordeaux) 졸업, 2001년 프랑스 건축사DPLG 취득 후 베르나르 뷜러(Bernard Buhler) 사무실에서 근무했다. 2008년 정림건축에 입사해 대한민국 역사박물관(2010-12), 광주남구 종합청사 리모델링(2011-13), 평창올림픽 개폐회식장(2015-17), 인천국제공항 제2터미널 증축 현상 당선(2017), LG ThinQ Home(2019-20) 등 다수 프로젝트 및 설계 경기에 참여했다. 정림의 대표적인 디자이너 중 한 사람으로서 정림건축의 디자인 정체성과 설계 방법론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

스마트시티 매거진 ‘XITY’, 커버스토리
NID SU 리더 기현철 님 인터뷰 게재

SK증권과 휴먼밸류가 공동 발행하는 스마트시티 매거진 ‘XITY’에 정림건축 N.I.D SU 리더 기현철 님의 (서면) 인터뷰가 게재되었습니다.

24년 여름에 개최되는 파리올림픽에 발맞춰 ‘올림픽 레거시와 지속가능성’이란 주제로 진행된 기획 기사(커버스토리)에서 기현철 님은 경기 시설에 대한 운영 방식 및 시설의 사후 활동 등 ESG 트렌드가 어떻게 고려되고 반영하고 있는지, 향후 2036년 서울올림픽 유치 준비에 대해 전문가의 견해를 이야기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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