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방에서 변화의 중심을 꿈꾸며, 이명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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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겁고 평평하고 붐비는 세계〉를 쓴 토마스 L. 프리드만은 2009년 COEX에서 열린 제4차 기후변화협약대책 WEEK의 연계 행사인 ‘그린포럼’에서 기조연설을 했습니다. 그는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한국기업과 각계각층의 참여를 역설했는데, 질의응답 시간 중 중국 매체 기자의 질문이 매서웠습니다. “유럽과 미국은 산업혁명을 거쳐 모든 경제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지금 지구환경의 중요성을 말하지만, 개발도상국은 이제 개발을 시작해야 합니다. 당신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결국 모든 발전을 차지한 후 뒤따라오는 국가를 견제하기 위함이 아닌가요?” 수백 명의 포럼 참여자가 긴장한 표정으로 프리드만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한국은 전화기를 발명한 나라가 아니지만 지금 전 세계 사람들은 삼성 스마트 폰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중국이 지금 환경 정책과 산업에 뛰어들지 않는다면, 오히려 안심입니다. 환경은 아직 주요 정책과 산업이 아니지만 변화는 시작되었고 방향은 정해졌으며 누가 먼저 시작하고 성취하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라는 인상적인 답변을 하였습니다.
글. 이명진 정림건축 대표이사
게재. 한국건축가협회지「건축가」통권 287호 (복간호 특집)

문화의 다양성을 주목하는 다원주의 시대
건축문화 주권을 위한 우리의 역할

‘K-드라마’를 비롯하여 한국의 영화, 음악, 음식, 문학과 뮤지컬은 특정 지역과 시기를 넘어 세계적으로 주목받으며 각종 수상 소식과 현지 관심을 한아름 받아오고 있습니다. 세계적 경향과 흐름에서 중심을 차지한 적이 없었던 한국의 콘텐츠와 문화는 어떻게 지금과 같은 관심을 받게 되었으며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1990년대 대중문화의 강력한 내적 혁신과 변화는 90년대 말 국민정부로부터 시작된 문화콘텐츠진흥 정책과 만나 시너지를 이루며 일본을 거쳐 동남아시아, 미국, 유럽으로 서서히 퍼져갔습니다. 이후로 30년 간 수많은 아티스트와 관계자들의 노력으로 그 위상은 눈부시게 발전했습니다.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말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건축으로 가보겠습니다. 건축 분야에서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는 프리츠커 상은 첫 회 미국의 필립 존슨 수상 이후 2000년대 초반까지 단게 겐조(일본), 프랭크 게리(미국), 노먼 포스터(영국) 등 건축 선진국의 스타 건축가들의 경연장이었습니다. 그러나 2016년 칠레 건축가 알레한드로 아라베나의 수상으로 보다 다양한 국가의 건축가들이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2017년 스페인의 라파엘 아란다, 2021년 프랑스의 라카통 앤 바살 스튜디오, 2022 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의 디에베도 프랑시스 케레, 2025 중국의 리우 지아쿤까지. 서양 중심적 시각에서 벗어나 변방에서 지역성을 살리고 사회적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건축가를 조명하고 있습니다. 문화와 기술, 건축이 한방향성을 가지고 그 중심과 주류에서 파생되어 발전해 나가던 세계는 이제 각 지역의 특수성과 다양성을 존중하며 공존을 추구하는 다원주의적 경향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한국 건축의
흐름과 현재


“근대화 과정은 유감스럽게도 한국인의 자각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자생적 변화라기보다는 급변했던 한국 정세에 휩쓸린 타율적 변화였다. (…) 이 과정에서 전통사회가 붕괴되면서 문화 주역의 몰락과 대체, 고유문화의 말살과 왜곡, 다국적 외래문화의 범람 등의 현상이 일어났고, 그 결과 자생적, 능동적 문화 ‘수용’보다는 일방적, 피동적 문화 ‘접변’이 발생하였다.” -「한국의 근대화 과정과 환경문화」를 시작하며, <SPACE> 251호(1988년 7월호)

한국 현대건축의 성장은 국가의 역사적 경험과 긴밀하게 맞닿아 있습니다. 한국은 자율적인 근대화를 이루어야 할 시기에 일제강점기와 전쟁, 분단이라는 깊은 상처를 겪었습니다. 이후 산업화에 따른 경제 성장과 도시화, 민주화가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고, 건축 역시 고속 성장에 대응하며 전례 없는 양적팽창을 경험했습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한국 건축은 두 가지 상반된 요구를 동시에 마주합니다. 하나는 도시 인프라와 산업 설비, 폭증하는 주거 수요에 즉각적으로 대규모 물리적인 대응을 벌인 것, 다른 하나는 세계 건축의 흐름—특히 서구 모더니즘의 영향—에 속한 채 한국 고유의 정체성을 모색하고 지켜나가는 일이었습니다. 한국 건축은 기능성과 효율성을 중심으로 급속히 확장되면서도 장소성과 문화성, 지역의 맥락을 어떻게 되살릴 것인가 하는 고민을 놓지 않았습니다.

김중업, 김수근, 김정철, 나상진, 김종성을 비롯한 1세대 건축가들은 한국 전통의 공간 개념과 미학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려는 시도를 통해 한국현대건축의 정체성을 구축하려 했습니다. 동시에 1966년 종합민족문화센터 및 종합박물관 현상설계와 1967년 부여박물관 왜색 논란으로 시대를 대표하는 건축 양식이 어떤 것인가를 두고 전통과 현대 사이에서 한국성의 논의가 촉발됩니다. 오늘날 그 유산은 다양한 방식으로 계승되고 있습니다. 1990년 4.3그룹은 문화로서의 건축과 그 토론의 장을 만들기 위한 공부 모임으로 출발해 한국적 민주주의, 한국적 건축과 전통 논의에서 벗어나 시대에 맞는 모더니즘과 한국성을 탐구했습니다. 이런 건축 운동은 건축 담론을 생산해 논쟁을 만들었고, 기존의 관점과 가치를 검증했으며, 한국 건축 제도의 개선과 교육시스템의 변화까지 이끌어냈습니다.

88올림픽을 기점으로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와 인터넷 기술의 발달, 개방적 문화가 형성되며 해외 유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은 2000년대 초부터 한국에서의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며 한국민의 이슈를 벗어던지고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건축 작품과 담론 형성, 교육을 시작합니다. 일부 건축가들은 해외 협업과 교류를 통해 국내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대형설계사무소는 이 시점에 국내 시장을 넘어 해외 진출을 시도하며 아시아와 중동, 중남미 등으로 진출합니다. 2010년 이후부터 젊은 건축가들이 지역 사회, 자연 환경, 공공성의 회복을 주요 가치로 삼아 한국 특유의 감성과 맥락을 재해석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도시뿐 아니라 지방 곳곳에서 공공건축, 민간 상업건축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전통적인 건축 설계 영역을 넘어 인테리어, 파빌리온, 설치(인스톨레이션), 브랜딩, AI 및 컴퓨테이셔널 디자인의 영역까지 그 활동 방위를 넓히고 있습니다. 이들은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국내 담론의 현장에서 왕성하게 발언하고, 국제 저널과 해외 건축 어워드에서 주목받으며 ‘K-Architecture’라는 용어가 하나의 설계 철학, 문화적 태도로 자리잡아가는 데 일조하고 있습니다. 강점기와 자주독립, 독재와 민주화, 성장과 분배, 전통과 현대의 갈등을 겪지 않은 세대가 출현하며 한국은 비로소 문화적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이 시대와 우리 사회의 문제 그리고 가능성에 스스로 집중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각과 자유를 통한 자생적 변화는 분명 우리의 건축에도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최근 해외 건축가의
국내 진출을 바라보며

현재 한국 건축계에서 대두되는 화두 중 하나는 해외 건축가의 한국 진출일 것입니다. “K”로 시작하는 모든 문화 장르가 세계를 휩쓸고, 한국의 미래 첨단 산업이 세계를 이끈다는 기사가 홍수를 이루고 있을 때 건축 분야는 상대적 박탈감을 겪고 있습니다. 노들 글로벌 예술섬 프로젝트 설계 공모에는 토마스 헤더윅(영국)이 당선되었고, 서리풀수장고는 헤르조그 앤 드뫼론(스위스)이, 충남아트센터는 3XN(덴마크)이 진행합니다. 삼표 부지 글로벌 업무지구는 SOM(미국)이 밑그림을 그리며, 삼성동 GBC 프로젝트에는 노먼 포스터(영국)가, 성수동 크래프톤 본사 프로젝트는 데이비드 치퍼필드(영국)가 그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공공 지명현상설계는 물론, 도시건축디자인 혁신 사업 등 공공정책 프로젝트뿐 아니라 민간에서 진행되는 프로젝트에도 해외 건축가가 초청되고 있습니다.

최근 토마스 헤더윅이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감독으로 선정되었고 지자체 명예 자문 건축가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정림건축도 이러한 흐름에서 예외는 아니어서 영동대로 복합환승센터와 홍익대학교 캠퍼스 개발 같은 초기 대형 프로젝트에서부터 소규모 민간 오피스 및 상업 시설에 이르기까지 해외 건축가들과 협업 중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발주처의 해외 건축가 선호 및 협력 요구는 강해질 것입니다.

해외 건축가들이 근래 부쩍 한국에 진출할 수 있던 이유는 뭘까요? 신축과 대형 개발이 드문 유럽 건축설계 시장의 특성상 자국 내 활동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기점으로 이들의 중국 진출이 가속화되었습니다. 이후 급격히 축소된 중국 시장의 영향과 미국 시장의 정체는 이들이 중동과 타 아시아 지역으로 눈을 돌리는 계기였습니다. 한편 한국은 해외 건축가를 통해 도시 경쟁력을 키우려는 지자체의 정책이 공격적으로 펼쳐졌으며, 민간 영역에서도 일부 소비 고객층의 욕구를 만족시키려는 국내 개발사와 건설사 등이 민간 부동산 사업에 스타 건축가를 끌어들였습니다. 공공과 민간, 대규모에서 소규모까지 모든 영역에서 해외 건축가를 선호했고 이에 즉각적인 화답이 이어지며 한국은 해외 건축가들의 매력적인 시장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비단 새로운 현상만은 아닙니다. 뮤지엄 산이나 DDP의 경우에서도 보듯 과거에도 해외 건축가의 단독 작업 또는 국내사와의 협업을 통한 국내 진출이 간헐적으로 있어 왔습니다. 양질의 건축물이 만들어지면서 도시의 매력과 경쟁력이 높아지고, 국내 건축계의 디자인과 기술에 대한 지평이 넓어지며 교류도 확대되는 등 순 작용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현재의 문제는 단기간 가시적인 성과에 치중한 정책들이 장기간 자연스럽게 진행되어야 할 도시의 성장과 문화의 자생을 저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의 확산 범위 및 속도가 공공은 물론 민간까지 넓고 빠르게 진행되며 국내시장에서 조차 생존하기 어려워지고 있는 국내 건축사무소의 생존에 대한 고민일 것입니다.

최근 이를 인지한 건축계 전반에서도 문제에 관심을 갖고 담론을 형성 중입니다. 건축사협회와 건축가협회 등도 목소리를 모아 세미나와 포럼을 주최해 회원과 대중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서울시는 6월 말 〈K-건축문화 종합지원계획〉을 발표해 국내 건축가들의 역량 향상 및 해외 진출을 적극적으로 지원할 것을 표명했습니다. 국제도시공간디자인상 신설, 신진 및 혁신건축가 발굴 및 지원, 건축가 존중 문화 정착을 위한 행정적 지원을 강화하며 가시적인 성과를 보임은 물론, 건축물이라는 하드웨어에만 집중해 왔던 정책을 소프트웨어 측면에서 보완하는 계획으로 국내 건축가에게 기회를 부여하며 보다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성장에도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변화의 흐름에 선 지금
건축계 우리의 역할

  • 건강한 경쟁과 자국 건축설계 육성을 위한 정책 마련
    이미 각계에서 많은 분들이 논의했듯 건강한 경쟁을 위해 기회를 공정하게 부여하며 자국의 건축설계 산업을 육성할 지속적인 지원 정책이 마련되어야 할 것입니다. 최근 〈K-건축문화 종합지원계획〉이 수립되는 과정에서 지자체 행정과 건축계 사이의 열린 소통 과정을 통해 구체적이고 실효적인 정책들이 나오게 된 것은 매우 고무적입니다. 오랫동안 건축계 안에서는 정책 관련 이야기에 자조적인 반응이 대다수였습니다. 오랜만에 만들어진 이러한 정책들이 더 많은 이해관계자와 정기적인 소통을 바탕으로 지속적이고도 본질적인 육성 계획으로 발전하고 또 전국적으로 확산되어야 합니다. 바쁜 현업 중에도 정책 수립 과정에 기꺼이 노력을 기울이는 분들께 많은 격려와 관심이 필요하고, 보다 많은 사람들의 참여 또한 중요합니다.
  • 국내 설계 대가 정상화
    고객과 사회의 국내 건축설계에 대한 인식 개선, 인허가 절차 및 행정 합리화, 건전성을 저해하는 기존관습 자정 노력 등 현업에서 부딪히는 절박한 숙제들이 산적해 있음도 사실입니다. 동시에 단순 문제 인식과 평가보다 해결에 초점을 맞추어 한 발짝씩 나아갈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습니다.
  • 글로벌 시장으로의 진출, 그리고 교류의 확대
    어려운 상황이지만 몇몇 선도적인 건축가와 조직은 그간의 노력으로 해외 시장에서 성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의 노력과 성과가 건축계에서 조명되고, 또 공유될 자리가 마련되어야 합니다. 해외 설계사의 국내 진출은 속도를 조절할 수 있으나 궁극적으로 시장은 더욱 개방될 것입니다. 그러니 안으로는 자체 경쟁력을 강화하고 밖으로는 진취적 도전을 함께 이루어 나갈 적극적인 지원 정책과 기업 정신이 필요할 때입니다. 또한 해외 건축가들이 국내 시장에서 활동하고자 협업할 시 단기적인 비즈니스나 프로젝트의 성과를 위함 이기보다 디자인과 기술의 교류, 인적 자원의 성장 및 장기적인 협업을 도모하는 형태로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한발 나아가 문화교류 활동에도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가 필요합니다. UIA를 비롯한 AIA, ARCASIA,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베니스비엔날레 등 국내외 각지에서 주최되는 글로벌 건축 문화행사뿐만 아니라 각 단체와 협회에서 새로이 추진 및 신설 중인 각종 행사를 통해 세계의 건축가, 단체들과 건강한 교류와 연대를 이루며 글로벌 담론에서도 한국의 건축이 존재감과 입지를 굳혀야 할 것입니다.
  • 비평과 담론의 재형성, 그리고 아카이브
    건축설계의 실행과 더불어 비평과 담론의 재활성화도 중요합니다. 2000년대 초까지 가득했던 담론과 이를 실었던 매체, 활동의 장이 하나 둘씩 사라지면서 건축계에서는 소수의 사람들과 단체만의 노력으로 비평과 담론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비평과 담론은 우리 건축 작업의 의미와 가치를 재발견하고 위치를 파악하게 하며 방향을 알려줍니다. 2010년 초 〈그림일기: 정기용 건축 아카이브〉전시를 시작으로 국립현대미술관의 건축 아카이브와 목천건축아카이브 등 아카이브 및 큐레이팅 문화도 본격적으로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아카이브 작업은 건축가와 그들의 작업, 생애, 당시의 시대 상황, 정치 사회 이슈, 구축 재료 및 기술 등을 충실히 수집하고 이를 바탕으로 연구와 전시를 꾸려나가며 사회와 대중, 역사에 연결합니다. 이러한 작업은 이제 서야 전 세대의 건축가를 보유하게 된 건축 신생국 한국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미래의 경쟁력은 우리의 역사로부터 시작됩니다.

변방에서 변화의 중심을 꿈꾸며

15년 전, ‘세계 속의 한국 건축’을 주제로 열린 세미나에서의 일입니다. 연사는 한국에서 저명한 건축가였으며, 해외에서도 여러 매체와 전시에서 다뤄지던 인물이었습니다. “한국은 세계의 건축에서 제3국의 위치에 있다.” 냉정하고 자조적인 표현에 듣는 놀라움과 의아함도 잠시. 국내의 빈약한 기반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세계의 한국건축에 대한 인식은 더욱 요원하다는 것을 그의 짧은 답변에서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현재. 그동안 주류라 인식되지 않았던 한국의 다양한 문화는 기술과 매체의 발달, 탈중심과 다원주의적 시각으로 세계 곳곳에서 꽃피고 있습니다. “변방은 변화를 일으키는 진원지다. 변방이 변방으로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중심이 되는 것은 그곳이 변화의 공간이자 창조의 공간이고 생명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변방을 찾아서. 신영복, 2012) 오랫동안 세계의 건축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한국 건축. 새로운 중심을 향한 변화와 창조를 위한 기회는 지금 여기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이명진. 첨단설계부문 대표이사. 2004년에 입사해 디자인랩과 설계그룹에서 디자인을 이끌어왔으며 2024년 첨단설계부문 대표이사에 취임했다. 업무, 교육 연구, 의료, 데이터센터 등 다양한 분야의 건축 작업을 수행했고 한국건축문화대상, 대구시건축상, 녹색건축 국토교통부장관상 등을 수상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SK하이닉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네이버 데이터센터 각 세종, 현대자동차 하이테크센터, 카카오 제주 아지트, 이대서울병원,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 원주세브란스 기독병원, 울산과학기술원 이차전지 산학연 연구센터, 대구은행 제2본점, SK 서린빌딩 뉴 워크플레이스 컨설팅이 있다.

건설 산업이 중대한 변곡점을 맞이했습니다. 수십 년간 이어져 온 현장 중심의 생산 방식은 고령화된 노동력, 숙련공의 실종, 끊이지 않는 안전사고, 그리고 높아진 공사비, 짧아진 공기, AI를 통한 기술력의 발전이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한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더 이상 ‘시공하는(Building)’ 방식으로는 미래를 담보할 수 없는 시점, ‘제작하는(Manufacturing)’ 건축인 OSC(Off Site Construction) 또는 모듈러 공법이 다음 대안으로 급부상하고 있습니다. 지난 6월 10일 열린 ‘뉴테크놀로지 세미나(Newtech Knowledge Seminar)’에서 설계, 시공, 제작을 아우르는 전문가들이 김정철홀에 모여 한국 모듈러 건축의 현주소와 미래를 진단했습니다. 이날 다루었던 내용들은 단순한 공법의 소개를 넘어, 자동차를 조립하듯 집을 생산하는 ‘제조업으로서의 건설’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습니다.
글 & 자료. 안성우 건축가 (정림건축 뉴테크SU 리더)
편집. 정림건축 통합마케팅SU 브랜드팀

01
건설업과
제조업 사이에서

1-1. 글로벌 스탠다드와 한국의 간극: 56층 럭셔리 vs 13층 임대주택

세계 시장에서 모듈러 건축은 이미 주류로 진입했습니다. 영국은 2000년대 초반부터 고층화에집중하여 이미 44층(텐 디그리, 크로이든) 규모의 모듈러 빌딩을 완성했습니다. 싱가포르의 ‘에비뉴 사우스 레지던스(Avenue South Residence)’는 무려 56층 규모로, 50평형대 이상의 대형 평형과 전용 엘리베이터를 갖춘 최고급 주거 상품으로 시공되었습니다. 미국 역시 인건비 상승과 주택난 해결을 위해 전체 건설 시장의 약 6~7%를 모듈러가 차지하며, 일본은 신축 주택의 15%를 모듈러 방식으로 공급하고 있습니다.

반면, 한국 시장은 전체 건설업 대비 0.2% 수준의 점유율에 머물러 있습니다. 가장 큰 원인은 ‘인식의 차이’입니다. 해외는 고급 호텔과 럭셔리 주거로 모듈러를 시작해 품질에 대한 신뢰를 쌓고 대중화한 반면, 한국은 공기 단축과 비용 절감에만 초점을 맞춰 최저가 주택과 군부대 막사 및 학교 교실 증축을 중심으로 시장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이로 인해 대중에게는 ‘컨테이너 박스’ 혹은 ‘저렴한 조립식 주택’이라는 부정적 낙인이 찍혀버렸습니다. 국내 최고층 기록인 용인 영덕 행복주택(13층)이 성공적으로 준공되었음에도, 시장의 판도를 바꾸기 위해서는 기술적 입증을 넘어 ‘살고 싶은 집’으로서의 상품성 확보가 절실한 상황입니다.

싱가포르의 에비뉴 사우스 레지던스(Avenue South Residence) 3,000개 이상의 3D 모듈을 조립하여 건설한 56층 초고층 모듈러 주택 / 출처: Avenue South Residence Official Site

1-2. 기술적 팩트 체크: 내화, 소음, 그리고 안전에 대한 오해

모듈러 건축에 대해서는 구조적 안전성과 거주 성능에 대한 의구심이 있지만, 이러한 우려는 기우에 지나지 않습니다.

  • 내화 성능의 극복
    13층을 초과하는 고층 건물은 법적으로 3시간 내화 성능을 확보해야 합니다. 현대엔지니어링이 시공한 용인 영덕 프로젝트에서는 기존의 뿜칠 방식이 아닌 ‘내화 석고보드’ 적층 공법을 통해 철골 모듈러의 화재 안전성을 입증했습니다.
  • 층간 소음과 진동
    철골 구조 특성상 울림이 심할 것이라는 우려와 달리, 바닥 충격음 테스트에서 중량 충격음 3등급, 경량 1등급을 확보했습니다. 이는 일반적인 아파트 수준과 대동소이하거나 오히려 우수한 수치입니다. 또한, 공장에서 단열재와 외장 마감을 정밀 시공하는 외단열 공법을 적용해 결로와 단열 성능에서도 기존 습식 공법보다 우수한 성능을 보여주었고, 기밀성 또한 훨씬 우수합니다.
  • 이동과 조립의 정밀도
    타일과 가구, 심지어 도배까지 공장에서 100% 마감된 상태로 현장에 운송되지만, 무진동 차량 운송 기술과 건식 접합 기술의 발전으로 크랙이나 파손 이슈를 해결했습니다.

1-3.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자동화와 경제성의 딜레마

모듈러 건축이 가진 공기 단축(기존 대비 30~50%)과 탄소 배출 저감(40~50%) 효과에도 불구하고, 현장에서는 여전히 “기존 공법보다 비싸다”는 장벽에 부딪힙니다. 여기에는 한국 특유의 기형적인 주택 구조가 한몫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벽식 구조 아파트(Wall Type RC)’가 보편화되어 있어, 이 초저가 공법과 가격 경쟁을 해야 하는 모듈러가 상대적으로 비싸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더 큰 문제는 ‘규모의 경제’입니다. 자동차 공장 같은 자동화 라인을 구축하려면 수백억 원의 투자가 필요한데, 연간 발주 물량이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무작정 설비를 투자하기엔 리스크가 너무 큽니다. 발주처는 단가가 낮아져야 발주를 늘리겠다고 하고, 제작사는 물량이 늘어야 투자를 통해 단가를 낮출 수 있다고 맞서는 논란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부 차원의 과감한 공공 발주 쿼터제나, 민간 시장 활성화를 위한 용적률·건폐율 인센티브, 그리고 모듈러를 하나의 ‘제품’으로 인정하여 ‘시공’에 적용되는 분리 발주 등의 규제를 완화하는 제도적 뒷받침이 시급합니다. 다행히도 최근 새롭게 모듈러 특별법 입안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1-4. 소재의 다변화와 하이브리드 전략: Steel vs. PC

국내 모듈러 시장은 철골 방식이 주도하고 있지만, 콘크리트 기반의 PC(Precast Concrete) 모듈러 역시 진화하고 있습니다. PC 모듈러는 무겁다는 단점이 있지만, 내구성과 차음성이 뛰어납니다. 최근 경량 PC 기술 개발을 통해 운송과 양중의 한계를 극복하고 있습니다.

향후 시장이 철골과 PC의 대결 구도가 아닌, 건물의 용도와 높이에 따라 두 공법을 섞어 쓰는 ‘하이브리드(Hybrid)’ 방식으로 나아갈 것으로 전망됩니다. 예를 들어 저층부와 코어(Core)는 PC나 RC로 단단하게 잡고, 상층부 주거 유닛은 경량 철골 모듈로 빠르게 적층하는 방식입니다. 이는 구조적 안정성과 시공 속도 향상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해법이 될 수 있습니다.

1-5. 건축가의 역할 변화: 설계자가 아닌 ‘프로덕트 코디네이터’

모듈러 시대, 건축 설계의 프로세스는 완전히 달라져야 합니다. 기존에는 건축가가 디자인을 완성하면 시공사가 이를 구현하는 방식이었다면, 모듈러는 기획 단계부터 제조사, 시공사, 설계사가 ‘원팀(One Team)’이 되어야 합니다.

운송 가능한 모듈의 크기(운송 폭, 높이 제한), 크레인의 양중 능력(모듈당 20~25톤), 공장 생산 라인의 특성을 고려한 설계(DFMA: Design for Manufacturing and Assembly)가 선행되지 않으면 프로젝트의 진행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집은 표준화된 플랫폼 위에서 옵션을 선택하는 ‘상품(Product)’으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테슬라와 LG전자가 주택 시장에 뛰어드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따라서 미래의 건축가는 단순한 도면 작성자를 넘어, 다양한 기술적 요소와 제조 공정을 조율하고, 표준화된 모듈 안에서 최상의 공간 경험을 이끌어내는 ‘프로덕트 코디네이터’로서의 역량이 요구됩니다.

결론: 제조업으로의 진화,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

건설업의 제조업화는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입니다. 0.2%라는 초라한 시장 점유율은 역설적으로 한국 모듈러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할 잠재력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해외처럼 50층 랜드마크 모듈러 빌딩이 한국에도 들어서야 사람들의 인식이 바뀔 것”이라는 예상처럼, 이제는 실험적인 시도를 넘어 과감한 고층화 프로젝트와 럭셔리 상품 개발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정부의 정책적 지원, 기업의 과감한 자동화 투자, 그리고 건축가들의 창의적인 디자인이 맞물릴 때, 한국의 건설 산업은 노동 집약적 산업에서 첨단 스마트 제조업으로 성공적인 체질 개선을 이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정림건축과 현대엔지니어링이 협력해 선보인 ‘H 모듈러랩’


02
OSC로의 변화에
대응하는 건축가

2-1. 모듈러 건축의 정의와 오해: ‘저렴한 조립식’이 아닌 ‘고비용 고품질’의 기술 집약체

우리는 지금 모든 건축 기술의 총집약체인 ‘모듈러 건축’의 시대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흔히 모듈러 건축을 단순히 공사비를 아끼기 위한 ‘저렴한 조립식 건물’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모듈러의 본질을 간과한 것입니다. 모듈러 건축은 친환경 기술과 BIM이 결합된 첨단 공법입니다.

건축물의 외벽이 갖추어야 할 필수 기능인 단열, 방수, 기밀성 등을 통제된 공장 환경에서 완벽하게 조립해서 나오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나 실제로나 현장 시공 대비 하자가 적은 ‘무결점 건물’을 지향합니다. 품질이 더 좋기 때문에, 모듈러 건축물은 더 고급입니다. 자동차처럼 대량생산이 가능하다면 고급이면서도 경쟁력 있는 가격으로 공급이 가능합니다.

공사 기간의 획기적인 단축, 고성능 자재의 적용, 대량 생산을 통한 규모의 경제 실현, 그리고 무엇보다 건설 현장의 고질적인 문제인 안전사고 저감이라는 큰 혜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초기 투자비용과 기술 개발 비용으로 인해 현재로서는 기존 건축물보다 가격이 높게 형성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싱가포르처럼 대다수의 주거 건축물이 모듈러로 시공되는 시기가 올 것입니다.

출처: FUTURA MODULAR ↩︎

2-2. 건설의 제조업화: OSC의 실현과 테슬라(Tesla)의 교훈

모듈러 건축의 성공은 곧 OSC(Off-Site Construction, 탈현장 건설)의 활성화에 달려 있습니다.OSC가 제대로 정착되려면 앞선 글에서 언급했듯이 건설 산업 구조 자체가 ‘제조업화’ 되어야 합니다. 이는 단순히 건물을 짓는 방식뿐만 아니라, 금융 조달(PF) 구조부터 인력 운용 방식까지 모든 것이 달라짐을 의미합니다. 자동차 시장의 판도를 바꾼 테슬라는 기존 자동차 시장의 강력한 기득권자들이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후발주자로 시장에 진입했습니다. 그들은 ‘저렴한 전기차’로 승부하지 않았습니다. 기존 내연기관차보다 가격이 비쌈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소프트웨어 기술력과 디자인, 그리고 혁신적인 사용자 경험을 앞세워 시장을 장악했습니다.

모듈러 건축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학교나 군부대 시설 등 관 주도의 수요가 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한계를 넘어서려면, 민간 소비자들이 기꺼이 더 높은 비용을 지불하고서라도 선택할 수밖에 없는 ‘매력적인 상품’이 되어야 합니다. 테슬라처럼 기술력이 뒷받침된 훌륭한 디자인이 필수적입니다. 소비자의 인식을 전환하고, 제도적으로 불리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한 정부의 정책적 지원도 중요하지만, 결국 시장을 뚫는 창은 ‘압도적인 상품성’입니다.

2-3. 국내 경쟁사들의 동향과 디자이너의 딜레마

현재 국내 대형 설계사들은 이미 모듈러 시장에 뛰어들었습니다. 삼우는 ‘Moffice(모듈러 오피스)’를 론칭하여 삼성의 각종 현장 사무소에 모듈러를 적용하고 있습니다. 포스코A&C는 그룹사의 철강 기술과 건축을 결합하여 오래전부터 모듈러 주택을 선보였고, 간삼 역시 오래전부터 주택 모델을 제작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최근에는 희림이 ‘미노(MINO, Modular Innovation)’를 출시했습니다. 희림의 경우 우리와 가장 비슷한 사업구조 및 건축주 층을 가지고 있는데 모듈러 사업에 새롭게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시행사업의 공동투자자와 협력하여 리조트 단지를 모듈러로 개발하는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론칭하고, 해외 진출 및 자사 사옥신축에도 적용할 계획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냉정하게 현실을 들여다보면, 이들 선도 기업들조차 대부분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다른 대형사들이 다 하니까 우리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불안감 섞인 목소리가 나오지만, 디자이너로서 단순히 모듈러 프로세스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는 큰 의미를 찾기 어렵습니다. 자동차 회사의 수만 명 직원 중 실제 자동차의 외형과 컨셉을 결정하는 디자이너가 극소수이듯, 제조업화된 건설 환경에서 단순 설계 인력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직접 제작(Construction/Manufacturing)을 겸하지 않는 순수 설계 사무소가 모듈러 시장에서 어떻게 수익을 내고 생존할 것인가는 우리 정림건축을 포함한 모든 설계사무소의 고민거리입니다.

2-4. DfMA의 세계: 설계의 패러다임이 바뀝니다

그렇다면 이 새로운 전장에서 디자이너는 어떤 무기를 갖춰야 할까요?

핵심은 DfMA(Design for Manufacture and Assembly, 제조 및 조립을 고려한 설계)로의 전환입니다. 우리가 기존에 수행하던 건축 설계가 얼마나 ‘대충’ 이루어졌는지는 BIM 설계를 수행해보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BIM으로 디자인하지 않고 2D로 도면을 납품한 뒤, 현장 작업자의 기술력과 융통성에 의존하던 방식은 모듈러에서 통하지 않습니다. 모듈러 설계는 볼트 하나, 배관의 조그만 오차까지 미리 계산해야 하는 완전히 다른 프로세스를 거칩니다.

  • 접합부(Joint) 디테일의 기술적 해결
    모듈과 모듈이 만나는 접합부는 모듈러 건축의 아킬레스건입니다. 완벽한 단열, 방수, 기밀 성능을 확보하면서도 현장 조립이 간편한 디테일을 풀어내야 합니다.
모듈러 접합부 시공 예시
모듈러 접합부 단면 예시
  • 고성능 거주 환경 구현
    층간 소음 해소를 위한 바닥 구조, 층상 배관을 고려한 모듈형 화장실(POD) 등의 설비 통합 기술이 필수적입니다.
출처: modutechsystems ↩︎
  • 공장 제작률의 극대화
    모듈러 성공의 핵심 요소는 현장 작업을 얼마나 줄이고 공장 작업을 늘리느냐에 있습니다. 현재는 외장재 패널의 일부를 현장에서 후공정으로 부착하는 경우가 많아 완전한 공장 제작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디자이너는 외장 마감까지 공장에서 미리 부착해 현장에서는 조립만 할 수 있는 혁신적인 디테일을 고안해야 합니다.

2-5. 미래의 건축: ‘선택형 주문 주택’과 건축가의 역할 변화

장기적으로 건축은 제조업과 통합되어 갈 것입니다. 자동차를 주문하면 집 앞으로 배송되듯, 주택 또한 소비자가 색상, 인테리어 사양, 외장재 옵션을 선택하면 공장에서 제작되어 배달되는 시대가 올 것입니다. 이때가 되면 건설업과 제조업의 경계가 희미해집니다. 이러한 미래에 대비하여 건축가는 ‘컴퓨테이셔널 디자인’ 기법을 적극 활용해야 합니다. 모듈러의 단점인 획일적인 디자인을 극복하기 위해, 최적의 외장 패널라이징 기술을 통해 경제성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심미적으로 수려한 디자인을 구현해야 합니다. 모듈러의 표준화를 제시하되, 그 안에서 무한한 가변성을 갖추도록 디자인하는 것이 건축가의 능력입니다.

결론적으로, 모듈러 시대의 건축가는 단순히 도면을 그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건축가는 최적의 재료를 발견하고, DfMA 기반의 공법과 디테일을 개발하며, 시장을 선도할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R&D 전문가’이자, 생산자(공장/시공사)와 소비자(건축주) 사이에서 시장의 활성화를 조율하고 지휘하는 ‘마에스트로(Maestro)’가 되어야 합니다.

정림건축이 경쟁사와 차별화되는 길은 바로 이 ‘지휘자’로서의 기술적, 미적 역량을 선제적으로 확보하는 데에 있습니다. 싱가포르 등 선진 해외 사례를 끊임없이 연구하고, 우리만의 독보적인 기술적 디테일과 디자인 솔루션을 갖출 때, 비로소 활짝 펼쳐질 모듈러 시장에서 강자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03
단순반복을 넘어선
모듈러 입면 디자인

모듈러 건축은 그동안 생산성 향상과 공기 단축이라는 명확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단조로운 조립식 건물’ 혹은 ‘저렴한 임시 거처’라는 오해와 편견 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반복적인 그리드와 제한된 디테일로 인해 발생하는 획일적인 외관은 모듈러 건축의 시장 확장을 가로막는 심리적 장벽이었습니다. 이제 모듈러 건축은 공장 제작의 정밀도와 디지털 패브리케이션의 잠재력을 결합한 새로운 미학의 영역으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3-1. 프로세스의 전환: ‘덧붙임’에서 ‘통합’으로

일반 건축의 입면이 골조 완성 후 외장을 덧붙이는 방식이라면, 모듈러는 구조와 내외장이 동시에 제작되는 통합 시스템입니다. 이는 일체형 구조, 모듈의 규격, 운송, 접합의 제약이 디자인의 시작 단계부터 깊이 고려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성공적인 모듈러 입면을 위해서는 초기 단계부터 구조 그리드, 창호 인터페이스, 외피 패널라이징을 일괄 검토하는 ‘통합 설계’가 필수적입니다. 코너와 모듈 접합부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전략, 그리고 공장에서 사전 조립 가능한 방수 및 기밀 디테일의 표준화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3-2. 제약조건을 기회로 치환하는 전략

모듈러 디자인의 핵심은 ‘제약의 극복’이 아니라 ‘제약의 활용’에 있습니다.

  • 첫째, 그리드 종속성의 탈피입니다. 
    유닛 적층으로 인해 발생하는 필연적인 반복성은 베이(Bay) 리듬을 세분화하거나 ‘Mirror’, ‘Shift’, ‘Encroach’와 같은 변형 액션을 통해 극복할 수 있습니다. 동일한 몰드 내에서도 파라메트릭 설계를 통해 패턴의 깊이와 질감을 달리하는 디지털 제작 방식은 특별한 비용증가 없이 시각적 다양성을 확보하는 핵심기술입니다.
  • 둘째, 정밀 제조의 이점 활용입니다.
    현장 시공보다 월등히 높은 공장 제작의 정밀도를 활용하여 3D 형상이나 미세 디테일을 구현하고, 표준 패널 사이에 국소적인 커스텀 인서트를 혼합함으로써 비용 효율과 심미적 완성도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습니다.

3-3. 운송과 시공을 고려한 디자인

입면 디자인은 도로라는 물리적 인프라에 종속됩니다. 통상적으로 폭 3.4m, 높이 3.4m, 길이 12m 이내의 운송 표준 사이즈를 고려해야 하며, 국토교통부의 제한차량 운행허가 시스템(https://ospermit.go.kr/Main)을 통해 주요 운송 도로의 허용 기준(폭, 높이, 중량 등)을 사전에 면밀히 검토해야 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디자인도 현장에 온전하게 도착하지 못하면 무용지물입니다. 운송 중 발생하는 진동과 충격, 현장 적층 과정에서의 파손을 방지하기 위한 디자인 전략은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 하부 이격
    모듈 하부와 외장재 최저점 사이에는 최소 100mm 이상의 이격을 확보해야 합니다. 이는 운송 및 양중 시 발생할 수 있는 모서리 파손을 방지하는 완충지대 역할을 합니다.
  • 돌출부의 제어
    입면의 깊이감을 주는 루버나 차양판 등은 도로별로 확인한 운송제한 폭을 초과하지 않도록 설계하거나, 초과 시 현장 조립(Knock-down) 방식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 저진동 운송과 보양
    디자인 단계에서부터 저진동 차량 운송을 전제로 하거나, 모듈의 무게중심과 리프팅 포인트를 고려한 외장재 분할 계획이 수립되어야 합니다.

3-4. 접합부(Joint) 디자인: 드러낼 것인가, 숨길 것인가

모듈과 모듈이 만나는 접합부는 모듈러 건축의 가장 큰 숙제이자 특징입니다. 구조 체결 방식(실내/실외)에 따라 입면 디자인이 달라져야 합니다.

  • Grid 전략 (정렬과 강조)
    모듈러의 구조적 질서를 그대로 드러내어 접합부를 디자인 요소로 승화시킵니다. 조인트를 정직하게 노출하고 정렬함으로써 명확한 리듬감을 부여합니다. 이 방식은 시공이 단순하고 비용 효율이 높습니다.
  • Staggered 전략 (분산과 은폐)
    입면상 모듈의 위치를 엇갈리게 배치하거나 비규격 패턴을 반복하여 시선을 분산시킵니다. ‘제어된 불규칙성’을 통해 접합부의 존재감을 희석시키고 역동성을 부여합니다. 단, 코킹이 아니라 오픈조인트(10~15mm) 시공방식 등을 통해 시공 오차를 흡수할 수 있는 디테일이 필요합니다.

파사드는 단순한 건물 외피가 아니라 방수, 방습, 단열, 기밀, 채광, 환기, 화재안전, BIPV 등을 통합하여 건물의 에너지 성능 및 여타 모든 기능을 책임지는 시스템이자,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형성하는 정체성입니다. 모듈러 파사드는 여기에 더해 규격화(Standardization)와 맞춤화(Customization) 사이의 최적 균형점을 찾아내고, 운송과 조립이라는 공업화 건축의 특성을 디자인 언어로 재해석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모듈러 건축을 ‘임시 건물’의 오명에서 벗어나게 하고, 미래 건축의 새로운 표준으로 자리 잡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모듈러를 통해 더 빠르고, 더 정밀하며, 더 아름다운 건축을 디자인해야 합니다.

모듈러 입면 디자인
파라메트릭 디자인을 활용한 삼각형 모듈 패턴 구현

Intro

새벽배송, 당일배송, 오늘배송. 하루가 다르게 빨라지고 있는 배송 시스템의 기반에는 물류시설 건축이 있습니다. 물류시설은 농경 사회에 남은 생산물을 보관하기 위해 시작된 건축입니다. 이후 유통 환경과 산업 구조의 변화에 맞춰 점차 새로운 형태로 발전해 왔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물류센터는 어떤 변화를 거쳐 현재의 모습에 이르게 되었을까요? 인공지능(AI)의 확산과 산업 구조의 변화 속에서 물류센터에는 어떤 새로운 요구가 등장하고 있으며, 건축적으로 중요한 요소는 무엇일까요.

현대의 창고건축 즉 물류센터는 새로운 건축 재료와 구조 기술의 발전을 바탕으로 빠르게 진화해 왔습니다. 특히 최근에는 대형화와 자동화를 기반으로 한 ‘4세대 물류센터’가 등장하며 물류센터의 역할과 형태가 크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물류센터 건축이 시대의 요구에 따라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살펴보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함께 알아봅니다.

글 & 자료. 박성형 건축가 (정림건축 로지테크BU 리더)
편집. 정림건축 브랜드팀

물류센터의 변화
1세대에서 4세대까지

1세대

보관 중심의 저장형 창고

1세대 창고는 물품의 입출고가 빈번하지 않은 단순한 소규모 저장창고입니다. 주로 인력이나 간단한 장비를 활용해 물품을 적재하거나 저장하는 보관형 창고입니다. 물품을 랙(Rack)1에 적재하는 구조이기 때문에 충분한 구조 하중과 높은 층고가 필요합니다.

일산농협창고 / 출처: 고양신문 (2021.05.24) [Link]

2세대

운송 중심의 유통형 창고

도로망과 운송 시스템이 발달하면서 2세대 창고가 등장했습니다. 이 시기의 핵심 개념은 크로스 도킹(Cross Docking)2입니다. 크로스 도킹은 물품을 창고에 보관하지 않고, 입고된 물품을 즉시 분류하여 출고 차량으로 바로 보내는 무재고(無在庫) 유통방식입니다.

보관 기능이 최소화되었기 때문에 높은 층고나 랙 설치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대신 빠른 작업을 위해 입고장과 출고장을 건물의 양쪽에 배치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러한 창고는 운송 중심의 유통형 창고(TC : Transfer Center)라고 합니다.

대한통운 양산복합물류터미널 / 출처: 한국해운신문 (2009.06.10) [Link]
경동택배 군포터미널 유통형 창고 내부 / 출처: (주)서진로지스 [Link]

3세대

보관과 유통이 결합된 물류센터

유통 산업이 본격적으로 성장하면서 3세대 창고가 등장했습니다. 이 시기의 창고는 운송과 보관 기능이 결합된 형태입니다. 1층에는 물품의 입출고를 위한 도크(Dock)와 크로스 도킹 기능이 배치되고, 2층 이상에는 랙을 설치해 물품을 보관하는 구조입니다. 각 층은 화물 엘리베이터나 수직 반송기3 등 물류 이동 설비를 통해 연결됩니다. 이를 통해 입출고와 보관이 하나의 시스템으로 운영됩니다.

농심 인천복합물류센터, 정림건축 설계 (2019년 준공)
2세대와 3세대 창고를 동시에 운용 중인 군포복합물류단지 (1999년 준공) / 출처: 한국산업단지공단 및 시흥시 산업단지 홍보자료

4세대

대형화된 복합 물류센터

현재 개발되는 대부분의 물류시설은 4세대 창고로 분류됩니다. 대형화와 운영 효율을 극대화한 복합유통센터 형태입니다.이커머스(e-commerce) 시장의 폭발적인 성장으로 인해 빠르고 정확한 배송을 위한 물류 거점이 필요해졌습니다. 특히 고객에게 상품을 전달하는 마지막 단계인 ‘라스트 마일(Last Mile)4’ 배송을 담당하는 물류센터가 중요해졌습니다.

4세대 물류센터는 보통 최소 2~3만 평 이상의 대형 적층형 구조로 건설됩니다. 모든 층에 입출고 도크와 보관 랙을 설치하고, 대형 화물 차량이 각 층에 직접 접근할 수 있도록 램프(Ramp way)5를 적용합니다. 이를 통해 물품의 입출고 속도를 높이고 배송 시간을 단축할 수 있습니다.

한 쌍의 Up-Down 램프를 통해 각 층 접안이 가능한 CJ대한통운 부천 삼정 물류센터, 정림건축 설계 (2026년 준공예정)
직선 램프를 통해 각 층 접안이 가능한 쿠팡 광주 FC 물류센터, 정림건축 설계 (2023년 준공)

앞으로의 물류센터

5세대와 6세대를 넘어 : 자동화

물류센터 건축은 시대의 변화와 요구에 맞춰 지속적으로 진화해 왔습니다. 최근에는 AI, 드론, 로봇 기술의 발전으로 무인 자동화 창고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습니다. 물류센터에서는 일반적으로 입고 → 검수 → 보관 → 피킹6 → 분류 → 출고의 과정을 거칩니다. 

이 과정에서 AGV7, AMR8 등의 자동 이송 장비와 로봇 시스템이 도입되면서 건축 구조와 공간 계획에도 새로운 변화가 요구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물류센터 건축은 지금도 새로운 기술과 산업 구조에 맞춰 계속 진화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5세대, 6세대 물류센터로 발전하며 더욱 다양한 형태가 등장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1. Rack : 물품을 층층이 적재하기 위한 선반형 구조 시스템 ↩︎
  2. Cross Docking : 물품을 창고에 저장하지 않고 입고 즉시 분류해 출고하는 물류 처리 방식 ↩︎
  3. 반송기(搬送機) : 물품을 자동으로 층간 이동시키는 물류 설비 ↩︎
  4. Last Mile : 물류센터에서 소비자의 집까지 상품을 전달하는 마지막 배송 구간 ↩︎
  5. Ramp way : 차량이 건물 내부 각 층으로 직접 이동할 수 있도록 만든 경사형 진출입로 ↩︎
  6. 피킹(Picking) : 주문된 상품을 창고에서 찾아 꺼내는 작업 ↩︎
  7. AGV(Automated Guided Vehicle) : 지정된 경로를 따라 이동하는 무인 운반 로봇 ↩︎
  8. AMR(Autonomous Mobile Robot) : 주변 환경을 인식하며 자율적으로 이동하는 물류 로봇 ↩︎

Intro

창고는 ‘머무는 건축’보다는 ‘기능을 수행하는 건축’에 가깝습니다. 인류가 잉여를 저장하기 시작하며 탄생한 오래된 건축 형식 중 하나입니다. 그렇기에 이 안에는 시대의 기술과 환경에 대한 정직한 해답이 담겨 있습니다. 저장을 위해 진화해 온 창고건축의 역사 속 케이스를 살펴봅니다.

글 & 자료. 박성형 건축가 (정림건축 로지테크BU 리더)
편집. 정림건축 브랜드팀
쿠팡 광주첨단물류센터, 정림건축 설계

시대를 반영하는
창고건축

건축은 흔히 ‘머무는 공간’으로 이야기되지만, 인류의 정착 생활을 가능하게 만든 중요한 건축 중 하나는 저장하기 위한 공간, 즉 창고입니다. 농경 사회로 접어들며 잉여 생산물이 생기자, 이를 안전하게 보관하는 일은 생존과 직결된 문제가 되었습니다. 주거와는 달리 사람이 상시 머무르지 않는 공간이었던 창고는 오히려 기능에 더욱 충실할 수 있었고, 그만큼 새로운 구조와 재료, 공법을 실험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물류센터와 자동화 물류센터 건축으로 이어지는 이 흐름은, 약 1만 년 전 인류의 농경 정착 생활에서부터 시작된 오래된 건축의 역사입니다.

  • 시대적 요구에 따른 필연적 변화
    창고건축은 저장하는 물품의 종류와 시대적 요구에 따라 매우 다양한 형식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곡물, 무기, 경전, 얼음 등 무엇을 저장하느냐에 따라 구조와 재료, 형태가 달라졌습니다.

  • 비거주 건축이라는 특이점
    사람이 상시 거주하지 않는 공간이라는 점은, 창고가 기존 주거 건축의 관습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 결과 창고는 각 시대마다 건축적 실험과 기술적 진보가 가장 적극적으로 이루어진 공간이 되었습니다.

Case 1.
고구려 <부경>

습기를 차단한 고상식 창고

고구려에는 땅에서 올라오는 습기를 막기 위해 바닥을 지면에서 띄운 필로티 구조의 고상식 창고 ‘부경(桴京)’이라 불리는 창고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창고는 집집마다 설치될 정도로 보편적인 건축이었습니다. 작은 창고의 형태로 곡식, 찬거리, 소금 등을 저장되었습니다. 고구려 고분 벽화와 함께 현재까지 남아 사용되고 있는 중국 길림성 일대 살림집의 창고 형태를 통해 당시의 구조를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이는 저장물의 부패를 막기 위해 자연환경을 적극적으로 고려한 건축적 해법이었습니다.

나라에 큰 창고가 없으며, 집집마다 각기 조그만 창고를 가지고 있는데, 이를 부경(桴京)이라고 한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고구려조
평안남도 덕흥리의 고구려 고분벽화

Case 2.
삼국시대 이전 <정창원>

목조건축으로 완성한 저장의 기술

삼국시대 이전부터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상식 창고 가운데, 일본 황실에 남아 있는 정창원(正倉院)은 가장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왕실의 유물을 보관하는 창고로 사용되었으며, 통나무를 가공해 맞물리게 쌓는 ‘귀틀집’ 방식으로 지어졌습니다. 못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도 구조적 안정성을 확보한 목조건축입니다. 저장 공간이면서도 정교한 구조를 갖춘 정창원은 당시 목조건축 기술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산입니다.

출처: 일본의 정창원, 동북아역사재단

Case 3.
조선시대 <해인사 장경판전>

자연 환기로 600년을 지키다

한국 창고건축을 대표하는 사례로는 해인사 장경판전을 들 수 있습니다. 이 건물은 상부와 하부의 창 크기와 형태를 다르게 구성하고, 큰 창과 작은 창이 서로 마주 보도록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독특한 통풍 구조는 내부 공기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조절해, 습기와 온도를 안정적으로 유지합니다. 그 결과 팔만대장경은 별도의 기계 설비 없이도 600년 이상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자연환경을 정밀하게 이해하고 활용한, 기능적인 아름다움을 담은 건축의 정수라 할 수 있습니다.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 / 출처: 국가유산청

Case 4.
<빙고>

저온창고의 시작

현대의 냉동·냉장창고는 콜드체인1 시스템을 통해 식품 유통에 큰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새벽배송과 신선식품 유통은 이러한 저온창고 기술의 발전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이와 유사한 역사적 사례로는 조선시대 겨울철 한강에서 채취한 얼음을 저장하던 빙고(氷庫)가 있습니다. 서울의 동빙고동과 서빙고동이라는 지명은 그 흔적을 전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경주에서 신라시대 빙고 유적이 발견되며 그 역사가 더욱 오래되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출처: 청도 석빙고 내부 및 외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Case 5.
기원전 2세기 로마
<포르티쿠스 아이밀리아>

로마의 곡물창고, 아치 건축의 실험장

냉동창고는 아니지만 저장 기능과 구조 실험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사례로, 기원전 193년 로마 티베르강 인근에 지어진 대형 곡물창고 포르티쿠스 아이밀리아(Porticus Aemilia)가 있습니다. 이 건물은 강변의 경사지를 활용해 배럴볼트2 구조를 연속적으로 배치했으며, 전체 규모는 약 487×60m에 달합니다. 상부 아치의 높이 차이를 이용한 환기 구조는 이후 서양 건축에서 아치 구조가 내부 공간을 확장하는 방식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저장을 위한 공간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서양 건축 공간 개념을 발전시킨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포스티쿠스 아이밀리아 평면도 및 복원도 / 출처: Axonometric view of the Porticus Aemilia. After G. Gatti (1934), reproduced in Rodríguez Almeida (1984), p. 31, fig. 4.

Case 6.
1884년 <번사창>

근대 한국의 무기고

삼청동 한국금융연수원 내에 위치한 번사창은 1884년에 지어진 기기국 무기고입니다. 이 건물은 외벽을 회색 벽돌로 쌓고, 지붕은 서양식 트러스 구조를 적용한 맞배지붕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화약을 저장하던 무기고로서 방폭과 방화가 중요한 요구 조건이었으며, 이는 당시 한국 전통건축에서는 보기 드문 새로운 재료와 구조의 결합으로 이어졌습니다.

출처: 서울 기기국 번사창 후측면 및 내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Case 7.
20세기 <아산 윤승구 가옥 창고>

전통과 근대의 경계에 선 창고

1900년 전후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 아산 윤승구 가옥의 창고는 한옥에 벽돌을 더한 구조입니다. 붉은 벽돌로 네 면의 벽체를 두껍게 쌓고, 그 위에 대들보를 직접 걸쳐 지붕을 올렸습니다. 지붕은 한국 전통 목조건축의 맞배지붕을 유지하면서도, 벽체는 붉은 벽돌의 근대 구조를 채택해 기존 가구식 구조와는 다른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냈습니다. 특히 벽돌 벽체는 처마를 길게 내밀지 않아도 내구성을 확보할 수 있어, 전통 건축과는 차별화된 조형을 보여줍니다.

아산 윤승구가옥 창고 / 출처: Culture & History Traveling, Since 2008, Korea & World by younghwan

Case 8.
일제강점기 <소금창고>

정밀하고 최적화된 구조를 향해서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소금창고는 저장물의 특성이 건축 형태에 직접 반영된 사례입니다. 물매가 급한 박공지붕과, 널판을 겹쳐 시공한 비늘판벽은 빗물 침투를 효과적으로 막아줍니다. 특히 벽체를 약 10도 정도 기울여 쌓아 소금이 가하는 내부 압력을 견디도록 한 구조는, 저장물에 최적화된 건축이 어떤 형태로 구현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시흥 옛 소래염전 소금창고 / 출처: 경기역사문화원

‘저장’에서 ‘물류’로

창고건축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 공간이 보관 시설을 넘어 기술과 건축이 가장 빠르게 반영되는 건축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거주를 전제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조적 안정, 환경 제어, 재료 선택 등에서 보다 과감한 시도가 가능했고, 축적된 경험은 오늘날 대형 물류센터와 데이터 기반 자동화 물류 건축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참고자료
[한국 생활사] 창고의 역사, 김용만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

  1. 콜드체인: 제품이 생산되어, 소비자에게 전달될 때까지 일정한 저온 상태를 유지하는 유통 체계 ↩︎
  2. 배럴볼트(barrel vault) :  하나의 아치를 일정한 방향으로 연장하여 반원통형태로 형성되는 건축 요소를 말한다.  ↩︎

질문의 변화가
필요한 시점

AI가 건축가의 역할을 대체할 것인가?


요즘 건축가들 사이에서 자주 오가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AI가 우리의 역할을 대체하는 것 아닌가?’ 라는 질문입니다. 동시에 건축 강좌와 프로그램 중 가장 주목받는 주제 역시 ‘AI를 활용한 디자인’입니다. 이 흐름 속에서 건축가가 던질 질문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고 봅니다. AI가 무엇을 바꿀 것인가가 아닌, ‘우리가 어떻게 AI를 활용해서 설계 과정을 재구성할 것인가?’ 입니다. 건축가의 역할은 어떻게 확장될 수 있을지, 어떤 준비를 해나가야 할지를 고민할 시점입니다.
글 & 자료. 안성우 건축가 (정림건축 뉴테크SU 리더)
편집. 정림건축 브랜드팀

건축을 뒷받침하는 기술로

많은 분들이 건축에서 AI를 떠올리면 미드저니(Midjourney)처럼 인상적인 이미지를 생성하는 도구를 생각합니다. 최근에는 구글 나노바나나의 등장으로 기존 이미지 제작에 쓰이던 프롬프트 노하우가 무색해지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정림의 AI WORKS 공모전이나 주니어 커미티를 살펴보면 여전히 발표의 중심은 ‘AI이미지 생성’에 머물러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하지만 AI는 이미 멋진 건축 외관을 흉내내는 단계를 넘어섰습니다. 이미지의 화려함 뒤에 있는 구조적 질서와 설계 논리를 이해하고, 실제로 구현 가능한 건축을 뒷받침하는 기술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출처: 미드저니 홈페이지

책상 위 제도판에서 CAD로, CAD에서 BIM으로 이어진 흐름은 이제 AI에 이르렀습니다. 기술적 특이점에 도달해 있지만, 변화는 업무와 일상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쉽게 인식되지 않을 뿐입니다. 앞으로 건축에서 AI의 존재감은 ‘얼마나 멋진 그림을 그려내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타당한 논리를 제시하느냐’로 증명될 것입니다. 상상력이라는 펜을 든 디자이너이자, 논리라는 계산기를 든 엔지니어. 이 두 가지 시선을 모두 갖춘 AI는 설게의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갈 것입니다. AI의 과정이 담긴 미래의 건축은 우리의 상상보다 훨씬 더 선명하고 강렬할 것으로 예측합니다.

AI의 거대한 잠재력 ‘Smart Assistant’

AI가 그려내는 이미지는 창의적입니다. 마가렛 보든1의 창의성 이론2에 비춰보면, AI는 수만 명의 건축가가 축적해온 데이터를 빠르게 조합하며(조합적 창의성), 수천 개의 대안을 지치지 않고 탐색하며(탐색적 창의성), 기존의 문법을 넘어서는 방식(변혁적 창의성)으로 우리에게 영감을 줍니다. 하지만 이는 AI가 가진 잠재력의 일부일 뿐입니다. 더 중요한 점은 ‘이미지 생성기’를 넘어 설계 프로세스 전반을 혁신적으로 이해하는 ‘스마트한 조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미지 생성 너머 AI가 발휘하는 효율성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기획과 법규 검토 단계에서는 대지 조건만 입력해도 관련 법규를 충족하는 매스를 빠르게 도출하고 사업성 분석까지 지원합니다. 설계 과정에서 반복적인 작업을 자동화하여 주차 구획 배치, 코어 계획, 화장실 레이아웃 등을 알고리즘 기반으로 정리하여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합니다. 이렇게 확보된 시간과 여유는 건축가가 더 본질적인 고민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절약된 시간은 건축물의 형태나 공간감, 사용자의 경험을 고안하는 데 사용할 수 있습니다. 에너지 구조 최적화와 같은 공학적 분석에서도 AI는 매우 유용한 도구입니다. 설계 초기 단계부터 일조량과 바람길, 에너지 효율을 시뮬레이션하고, 합리적인 구조 시스템을 검토함으로써 잦은 설계 변경을 줄이고 완성도를 높일 수 있습니다. 이미지 생성에 그치지 않고, 데이터에 기반한 의사결정을 가능하게 합니다.

미래의 주도권을 위한 기본적인 태도

과거의 건축가는 도시와 건축 전반을 조망하며 방향을 설정하는 마스터 플래너이자 마스터 아키텍트의 역할을 수행해 왔습니다. 그러나 설계 과정이 세분화되고 전문화되면서, 오늘날의 건축가는 개별 업무와 조율에 더 많은 시간을 쓰게 된 것도 사실입니다. 머지않아 각자의 책상 위에 ‘나만의 비서’와 같은 에이전트 AI가 자리 잡게 된다면, 건축가는 다시 한 번 프로젝트 전체를 조망하고 판단하는 역할에 집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직접 모든 선을 그리는 테크니션을 넘어, 프롬프트로 다양한 가능성을 이끌어내고 결과를 선별하며 최종적인 책임을 지는 역할입니다.

이제 2D 도면이나 페이퍼 중심의 사고방식이라는 오랜 도구를 내려놓고, 데이터와 시뮬레이션이라는 새로운 언어를 설계 과정에 더해가야 할 때입니다. 앞으로 건축가는 프롬프트로 AI라는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다양한 결과물을 선별하고 큐레이팅하며, 최종적인 판단과 책임을 맡는 위치에 서게 될 것입니다.

미래의 주도권은 AI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건축가에게 달려 있습니다. 데이터의 파도 위에서 지휘봉을 드는 선택은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새로운 설계의 주도권을 손에 쥐기 위한 기본적인 태도일지도 모릅니다. 변화의 흐름 앞에서 주저하기보다, 그 흐름을 이해하고 타는 것.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준비일 것입니다.


  1. 마거릿 A. 보든(Margaret A. Boden): 인지과학과 계산주의 심리학 분야를 개척한 세계적인 학자  ↩︎
  2. 마거릿 A. 보든의 저서 ⌜창조의 순간⌟(고빛샘 번역, 21세기 북스, 2010년)에서 창의성을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었다 – 조합적 창의성, 탐구적 창의성, 변혁적 창의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