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장’에서 ‘물류’로, 시대를 반영하는 창고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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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
창고는 ‘머무는 건축’보다는 ‘기능을 수행하는 건축’에 가깝습니다. 인류가 잉여를 저장하기 시작하며 탄생한 오래된 건축 형식 중 하나입니다. 그렇기에 이 안에는 시대의 기술과 환경에 대한 정직한 해답이 담겨 있습니다. 저장을 위해 진화해 온 창고건축의 역사 속 케이스를 살펴봅니다.
글 & 자료. 박성형 건축가 (정림건축 로지테크BU 리더)
편집. 정림건축 브랜드팀

시대를 반영하는
창고건축
건축은 흔히 ‘머무는 공간’으로 이야기되지만, 인류의 정착 생활을 가능하게 만든 중요한 건축 중 하나는 저장하기 위한 공간, 즉 창고입니다. 농경 사회로 접어들며 잉여 생산물이 생기자, 이를 안전하게 보관하는 일은 생존과 직결된 문제가 되었습니다. 주거와는 달리 사람이 상시 머무르지 않는 공간이었던 창고는 오히려 기능에 더욱 충실할 수 있었고, 그만큼 새로운 구조와 재료, 공법을 실험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물류센터와 자동화 물류센터 건축으로 이어지는 이 흐름은, 약 1만 년 전 인류의 농경 정착 생활에서부터 시작된 오래된 건축의 역사입니다.
- 시대적 요구에 따른 필연적 변화
창고건축은 저장하는 물품의 종류와 시대적 요구에 따라 매우 다양한 형식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곡물, 무기, 경전, 얼음 등 무엇을 저장하느냐에 따라 구조와 재료, 형태가 달라졌습니다. - 비거주 건축이라는 특이점
사람이 상시 거주하지 않는 공간이라는 점은, 창고가 기존 주거 건축의 관습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 결과 창고는 각 시대마다 건축적 실험과 기술적 진보가 가장 적극적으로 이루어진 공간이 되었습니다.
Case 1.
고구려 <부경>
습기를 차단한 고상식 창고
고구려에는 땅에서 올라오는 습기를 막기 위해 바닥을 지면에서 띄운 필로티 구조의 고상식 창고1 ‘부경(桴京)’이라 불리는 창고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창고는 집집마다 설치될 정도로 보편적인 건축이었습니다. 작은 창고의 형태로 곡식, 찬거리, 소금 등을 저장되었습니다. 고구려 고분 벽화와 함께 현재까지 남아 사용되고 있는 중국 길림성 일대 살림집의 창고 형태를 통해 당시의 구조를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이는 저장물의 부패를 막기 위해 자연환경을 적극적으로 고려한 건축적 해법이었습니다.
나라에 큰 창고가 없으며, 집집마다 각기 조그만 창고를 가지고 있는데, 이를 부경(桴京)이라고 한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고구려조

Case 2.
삼국시대 이전 <정창원>
목조건축으로 완성한 저장의 기술
삼국시대 이전부터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상식 창고 가운데, 일본 황실에 남아 있는 정창원(正倉院)은 가장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왕실의 유물을 보관하는 창고로 사용되었으며, 통나무를 가공해 맞물리게 쌓는 ‘귀틀집’ 방식으로 지어졌습니다. 못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도 구조적 안정성을 확보한 목조건축입니다. 저장 공간이면서도 정교한 구조를 갖춘 정창원은 당시 목조건축 기술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산입니다.

Case 3.
조선시대 <해인사 장경판전>
자연 환기로 600년을 지키다
한국 창고건축을 대표하는 사례로는 해인사 장경판전을 들 수 있습니다. 이 건물은 상부와 하부의 창 크기와 형태를 다르게 구성하고, 큰 창과 작은 창이 서로 마주 보도록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독특한 통풍 구조는 내부 공기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조절해, 습기와 온도를 안정적으로 유지합니다. 그 결과 팔만대장경은 별도의 기계 설비 없이도 600년 이상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자연환경을 정밀하게 이해하고 활용한, 기능적인 아름다움을 담은 건축의 정수라 할 수 있습니다.

Case 4.
<빙고>
저온창고의 시작
현대의 냉동·냉장창고는 콜드체인2 시스템을 통해 식품 유통에 큰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새벽배송과 신선식품 유통은 이러한 저온창고 기술의 발전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이와 유사한 역사적 사례로는 조선시대 겨울철 한강에서 채취한 얼음을 저장하던 빙고(氷庫)가 있습니다. 서울의 동빙고동과 서빙고동이라는 지명은 그 흔적을 전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경주에서 신라시대 빙고 유적이 발견되며 그 역사가 더욱 오래되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Case 5.
기원전 2세기 로마
<포르티쿠스 아이밀리아>
로마의 곡물창고, 아치 건축의 실험장
냉동창고는 아니지만 저장 기능과 구조 실험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사례로, 기원전 193년 로마 티베르강 인근에 지어진 대형 곡물창고 포르티쿠스 아이밀리아(Porticus Aemilia)가 있습니다. 이 건물은 강변의 경사지를 활용해 배럴볼트3 구조를 연속적으로 배치했으며, 전체 규모는 약 487×60m에 달합니다. 상부 아치의 높이 차이를 이용한 환기 구조는 이후 서양 건축에서 아치 구조가 내부 공간을 확장하는 방식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저장을 위한 공간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서양 건축 공간 개념을 발전시킨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Case 6.
1884년 <번사창>
근대 한국의 무기고
삼청동 한국금융연수원 내에 위치한 번사창은 1884년에 지어진 기기국 무기고입니다. 이 건물은 외벽을 회색 벽돌로 쌓고, 지붕은 전통 목조건축의 왕대공 구조4를 적용한 맞배지붕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화약을 저장하던 무기고로서 방폭과 방화가 중요한 요구 조건이었으며, 이는 당시 한국 전통건축에서는 보기 드문 새로운 재료와 구조의 결합으로 이어졌습니다.

Case 7.
20세기 <아산 윤승구 가옥 창고>
전통과 근대의 경계에 선 창고
1900년 전후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 아산 윤승구 가옥의 창고는 한옥에 벽돌을 더한 구조입니다. 붉은 벽돌로 네 면의 벽체를 두껍게 쌓고, 그 위에 대들보를 직접 걸쳐 지붕을 올렸습니다. 지붕은 한국 전통 목조건축의 맞배지붕을 유지하면서도, 벽체는 붉은 벽돌의 근대 구조를 채택해 기존 가구식 구조와는 다른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냈습니다. 특히 벽돌 벽체는 처마를 길게 내밀지 않아도 내구성을 확보할 수 있어, 전통 건축과는 차별화된 조형을 보여줍니다.

Case 8.
일제강점기 <소금창고>
정밀하고 최적화된 구조를 향해서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소금창고는 저장물의 특성이 건축 형태에 직접 반영된 사례입니다. 물매가 급한 박공지붕과, 널판을 겹쳐 시공한 비늘판벽은 빗물 침투를 효과적으로 막아줍니다. 특히 벽체를 약 10도 정도 기울여 쌓아 소금이 가하는 내부 압력을 견디도록 한 구조는, 저장물에 최적화된 건축이 어떤 형태로 구현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저장’에서 ‘물류’로
창고건축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 공간이 보관 시설을 넘어 기술과 건축이 가장 빠르게 반영되는 건축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거주를 전제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조적 안정, 환경 제어, 재료 선택 등에서 보다 과감한 시도가 가능했고, 축적된 경험은 오늘날 대형 물류센터와 데이터 기반 자동화 물류 건축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참고자료
[한국 생활사] 창고의 역사, 김용만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
- 고상식 창고: 1층의 바닥면을 높게 만든 창고, 현대에는 트럭의 상하차대와 높이를 맞추기 위하여 활용된다. ↩︎
- 콜드체인: 제품이 생상된 이후, 소비자에게 전달될 때까지 일정한 저온 상태를 유지하는 유통 체계 ↩︎
- 배럴볼트: 아치에서 발전된 반구형 건물구조체로서 원형 ·육각 ·팔각 등의 다각형 평면 위에 만들어진 둥근 곡면의 천장이나 지붕을 말한다. ↩︎
- 왕대공 구조: 평보(tie beam) 위에 수직으로 왕대공(king post)을 세우고, 빗대공(strut)을 연결하여 지붕 하중을 분산하는 트러스 방식 ↩︎
질문의 변화가
필요한 시점
AI가 건축가의 역할을 대체할 것인가?
요즘 건축가들 사이에서 자주 오가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AI가 우리의 역할을 대체하는 것 아닌가?’ 라는 질문입니다. 동시에 건축 강좌와 프로그램 중 가장 주목받는 주제 역시 ‘AI를 활용한 디자인’입니다. 이 흐름 속에서 건축가가 던질 질문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고 봅니다. AI가 무엇을 바꿀 것인가가 아닌, ‘우리가 어떻게 AI를 활용해서 설계 과정을 재구성할 것인가?’ 입니다. 건축가의 역할은 어떻게 확장될 수 있을지, 어떤 준비를 해나가야 할지를 고민할 시점입니다.
글 & 자료. 안성우 건축가 (정림건축 뉴테크SU 리더)
편집. 정림건축 브랜드팀
건축을 뒷받침하는 기술로
많은 분들이 건축에서 AI를 떠올리면 미드저니(Midjourney)처럼 인상적인 이미지를 생성하는 도구를 생각합니다. 최근에는 구글 나노바나나의 등장으로 기존 이미지 제작에 쓰이던 프롬프트 노하우가 무색해지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정림의 AI WORKS 공모전이나 주니어 커미티를 살펴보면 여전히 발표의 중심은 ‘AI이미지 생성’에 머물러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하지만 AI는 이미 멋진 건축 외관을 흉내내는 단계를 넘어섰습니다. 이미지의 화려함 뒤에 있는 구조적 질서와 설계 논리를 이해하고, 실제로 구현 가능한 건축을 뒷받침하는 기술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책상 위 제도판에서 CAD로, CAD에서 BIM으로 이어진 흐름은 이제 AI에 이르렀습니다. 기술적 특이점에 도달해 있지만, 변화는 업무와 일상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쉽게 인식되지 않을 뿐입니다. 앞으로 건축에서 AI의 존재감은 ‘얼마나 멋진 그림을 그려내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타당한 논리를 제시하느냐’로 증명될 것입니다. 상상력이라는 펜을 든 디자이너이자, 논리라는 계산기를 든 엔지니어. 이 두 가지 시선을 모두 갖춘 AI는 설게의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갈 것입니다. AI의 과정이 담긴 미래의 건축은 우리의 상상보다 훨씬 더 선명하고 강렬할 것으로 예측합니다.
AI의 거대한 잠재력 ‘Smart Assistant’
AI가 그려내는 이미지는 창의적입니다. 마가렛 보든1의 창의성 이론2에 비춰보면, AI는 수만 명의 건축가가 축적해온 데이터를 빠르게 조합하며(조합적 창의성), 수천 개의 대안을 지치지 않고 탐색하며(탐색적 창의성), 기존의 문법을 넘어서는 방식(변혁적 창의성)으로 우리에게 영감을 줍니다. 하지만 이는 AI가 가진 잠재력의 일부일 뿐입니다. 더 중요한 점은 ‘이미지 생성기’를 넘어 설계 프로세스 전반을 혁신적으로 이해하는 ‘스마트한 조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미지 생성 너머 AI가 발휘하는 효율성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기획과 법규 검토 단계에서는 대지 조건만 입력해도 관련 법규를 충족하는 매스를 빠르게 도출하고 사업성 분석까지 지원합니다. 설계 과정에서 반복적인 작업을 자동화하여 주차 구획 배치, 코어 계획, 화장실 레이아웃 등을 알고리즘 기반으로 정리하여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합니다. 이렇게 확보된 시간과 여유는 건축가가 더 본질적인 고민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절약된 시간은 건축물의 형태나 공간감, 사용자의 경험을 고안하는 데 사용할 수 있습니다. 에너지 구조 최적화와 같은 공학적 분석에서도 AI는 매우 유용한 도구입니다. 설계 초기 단계부터 일조량과 바람길, 에너지 효율을 시뮬레이션하고, 합리적인 구조 시스템을 검토함으로써 잦은 설계 변경을 줄이고 완성도를 높일 수 있습니다. 이미지 생성에 그치지 않고, 데이터에 기반한 의사결정을 가능하게 합니다.
미래의 주도권을 위한 기본적인 태도
과거의 건축가는 도시와 건축 전반을 조망하며 방향을 설정하는 마스터 플래너이자 마스터 아키텍트의 역할을 수행해 왔습니다. 그러나 설계 과정이 세분화되고 전문화되면서, 오늘날의 건축가는 개별 업무와 조율에 더 많은 시간을 쓰게 된 것도 사실입니다. 머지않아 각자의 책상 위에 ‘나만의 비서’와 같은 에이전트 AI가 자리 잡게 된다면, 건축가는 다시 한 번 프로젝트 전체를 조망하고 판단하는 역할에 집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직접 모든 선을 그리는 테크니션을 넘어, 프롬프트로 다양한 가능성을 이끌어내고 결과를 선별하며 최종적인 책임을 지는 역할입니다.
이제 2D 도면이나 페이퍼 중심의 사고방식이라는 오랜 도구를 내려놓고, 데이터와 시뮬레이션이라는 새로운 언어를 설계 과정에 더해가야 할 때입니다. 앞으로 건축가는 프롬프트로 AI라는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다양한 결과물을 선별하고 큐레이팅하며, 최종적인 판단과 책임을 맡는 위치에 서게 될 것입니다.
미래의 주도권은 AI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건축가에게 달려 있습니다. 데이터의 파도 위에서 지휘봉을 드는 선택은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새로운 설계의 주도권을 손에 쥐기 위한 기본적인 태도일지도 모릅니다. 변화의 흐름 앞에서 주저하기보다, 그 흐름을 이해하고 타는 것.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준비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