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단계 더 나아가 미래를 바라보는 병원 설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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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tect & Architecture
고려대학교 안암병원 신관 메디컴플렉스
모상진, 우소영
모든 병원 설계를 시작할 때, 마스터 플랜을 수립하는데 병원뿐만 아니고 ‘캠퍼스 전체가 어떻게 성장할 것이냐’까지도 제안을 드렸습니다. (…) 마스터 플랜을 2006년부터 수립해 놓고, 그 그림에 따라서 아주 조금씩 단계별로, 예산이 확보될 때마다 건물을 지어 나갔고 환자를 치료하는 데는 최적이지만, 어떤 것도 개선되지 않은 상태로 계속 운영되었는데 그들의 비전에 대해서 우리가 ‘여러분은 어떤 학교, 어떤 고려대로 가겠냐’고 물어보면서 공간 구성을 같이 논의했습니다. (…) 지금 당장 지어야 하는 것을 바라보는 건 아니고 계속 성장했을 때, 이 끝이 뭔지를 고민하게 되더라고요.
황도원
웨이 파인딩(way-finding), ‘병원의 길 찾기’라고 하는데 내가 어디로 가야 되는지 그 방향성이 명확해야 합니다. 로비(아트리움)에 들어오면 본관과 신관이 한눈에 들어오고 사이니지에서 각 층에 뭐가 있는지 보이고 ‘호스피탈 스트리트(hospital street)’가 펼쳐지게 되고… 그러면 제가 가야 할 길이 편하게 보이는 거죠. 환자 동선, 의사 동선, 직원 동선, 보호자 동선, 일반인 동선 등 여러 복잡한 동선들을 모두 고려하는 동시에 환자들이 왔을 때, 보호자들이 왔을 때 길 찾기는 쉬워야 하고. 복잡한 건물이죠.
병원은 병상만 중요한 게 아니고 외래라든지, 중앙진료부라든지, 지원시설이라든지 이런 곳들이 뒷받침 되어야 병동도 같이 가는 건데 고대 안암병원은 1,000병상 규모를 가지고 있지만 하부 지원시설, 외래, 중앙진료부 등은 500 병상 정도밖에 안 되는 규모였어요. 증축을 하면서 병상 수는 크게 늘리지 않았고 대신 외래, 중앙진료부, 지원시설에 면적을 더 할애하여 ‘병원 시스템을 규모에 맞게 정상화시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소영
사용자가 우리한테 요청하는 게 지금 당장의 것을 해결하기에는 굉장히 좋을 수 있는데 우리는 한 템포 더 생각합니다. 조금 더 미래에 대응할 수 있는 제안을 드립니다. 그래서 가끔은 저희가 ‘고치지 마세요’, ‘설계 지금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는데 사실 설계자가 이런 얘기 하기는 되게 어렵잖아요. (…) 우리가 한 번 더 생각하는 것.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지 않을까라고 생각합니다.
부산항 북항 마리나 설계팀 대담: 중간 설계
부산항 북항 마리나의 현상(계획) 설계안을 분석했을 때 특화 프로그램의 부재로 인해 운영 측면에서 대응하기 어렵다는 약점이 대두되었다. 이에 생활 밀착형 프로그램을 도입하여 부산 지역 시민들의 접근성을 높이고 해양 레저 문화를 기반으로 한 커뮤니티 형성과 이용 활성화를 꾀해야 한다는 시사점이 도출되었다.
일시. 2023년 8월 9일 14:15 – 15:15
참여. 박재완, 천지혜, 오정택, 오가영
진행. 장혜인
1. 추가 프로그램
2. 국외 마리나 답사 및 분석
3. 요트 파빌리온 계획
4. 모형 제작 과정
5. 주 52시간제, 서로 도우며 일하기
6. 마치며
추가 프로그램
천지혜
현상에 당선되고 중간 설계에 본격적으로 돌입하자마자 팀이 새롭게 구성되었어요. 이 때 중심 역할을 한 사람들이 (오)정택, (오)가영, (김)영빈이었고 여기에 (김)현삼 소장님까지 계셨죠. 일반 현상 설계는 보통 계획 설계(Schematic Design, SD)로 간주해요. 그래서 ‘SD 팩이 어느 정도 구성됐으니 이대로 DD(Design Development, 중간 설계) 진행하면 되겠구나’하며 행복하게 뚜껑을 열었는데…. 발주처에서 프로그램을 새로 추가하겠다시는 거예요. 무엇을 추가할지는 미정이었고, 추가할 프로그램의 타당성 여부까지 파악해야 하니 사업성 검토 용역도 들어간 셈이었어요.
장혜인
어떤 프로그램을 넣어야 할지도 팀에서 다 찾으신 거고요?
천지혜
발주처에서 먼저 세 가지를 알려줬어요. 생존 수영장, 스킨 스쿠버, 실내 서핑장. 이 중 실내 서핑장을 제외한 나머지로 가게 됐죠. 공공에서 발주하는 현상 설계는 공사비 기반으로 계약하다 보니 프로그램 변경 시 기존 대비 비용이 얼마큼 추가된다는 근거가 제시되어야 해요. 프로그램이 추가된 설계 대안 2개를 작성해 각각의 예상 소요 비용을 새로 산출해야 했어요.
박재완
즉, 프로그램 제안이 최종적으로 반영될지 미지수인 상태에서 우선 평면적으로 풀어야 했던 거죠. 이 대안들을 작성하느라 정택 님이 많이 고생했어요. 수영장이랑 스킨스쿠버 풀을 육상 적층 시설 뒤에 넣어 건축면적을 최소화하는 식으로 만들었었죠?
오정택
네. 그러면서 수영장과 스쿠버 풀을 위아래로 쌓았죠. 개인적으로 저는 프로그램이 추가되는 게 오히려 좋았어요. 사실 프로젝트를 하면서 스스로에게 즐거움이나 보람을 찾아주려고 노력하고 있었거든요. 추가 프로그램을 요구 받게 되자 ‘기회다’ 싶었죠. 현상안에 없었던 시설을 백지 상태에서 만드는 일이니 보다 신경 써서 작업했어요. 그리고 대안에 따른 견적을 산출하는 기간과 국외 답사 기간이 겹쳐서, 지혜 님과 이틀에 한 번 꼴로 연락하면서 견적을 맞춰 나갔고요.
천지혜
시차가 정반대로 나니까, (웃음) 사무실에서 오후에 작업한 양을 보내주면 우리는 아침에 확인해서 피드백 하는 식으로, 그렇게 진행했어요. 견적은 건축뿐만 아니라 구조나 설비 같은 타 분야에서도 받아야 하는데, 그런 취합 과정을 정택 님이 같이 도맡아서 해 줬죠.
국외 마리나 답사 및 분석
장혜인
자료를 보니 국외 답사는 규모가 꽤 컸던 것 같아요.
천지혜
발주처 분들을 모시고 정림건축, ING, 한국항만기술단 3사가 모두 참여했어요. BPA에서는 마리나 프로젝트 담당 실장님, 설계 관리 감독님, 마리나 운영 담당하시는 분이 합류하셨고요. 체류와 이동 기간을 포함해 9박 10일 동안 지구 반 바퀴를 돌면서 11개 마리나를 방문했습니다. 저희를 인솔하기 위해 답사지마다 계류 시설 담당자, 마리나 운영 담당자, 심지어는 마리나 회장님이 나오시기도 해서 운영 면에서 여러 주체와 역할이 있다는 걸 실감하기도 했어요.
장혜인
가셔서는 무얼 조사하고자 했는지.
천지혜
인터뷰 질문지는 마리나 시설 설계와 운영 전략, 크게 두 축으로 준비했었어요. 시설 설계 관해서는 저희가 사전 조사를 주로 도맡았었고, 운영에 관해서는 BPA 담당자 분이 답사 시에 직접 조사하시는 걸로 하고요.
오정택
11개 답사지는 유명하지 않은 마리나가 다수였어요. 구글 어스에서 찾아보면 어느 외딴 마을에 만들어져 있거나 하기도 했어요. 리뷰 사진들은 동네 사람들이 직접 찍어 올린 것들이라, ‘이분들은 이렇게 작은 마리나를 이렇게도 쓰시는구나’하고 놀라웠던 동시에 현실적으로 와 닿았었어요.
천지혜
규모가 제일 작았던 두 곳 말이죠? 그러니 11개 답사지는 어디 대단히 저명한 시설로만 추린 것도 실은 아니었던 거예요. 마리나를 아시는 분들에게 ‘뭐든 좋으니 이름이라도 알려달라’며 받은 곳들도 있었거든요.
박재완
그리고 거길 가 보지 않았다면 보고서도 맥아리가 없었을 거예요.
장혜인
말씀하신 대로 사전 보고서와 결과 보고서, 두 가지가 작성되어 있어요. 분석이라고 하면 어떤 틀을 설정하느냐에서 출발해 객관적으로 설득되는 수치나 결과가 나와야 할 텐데요. 어떻게 작성하셨는지?
오정택
사전 보고서 양식은 개발기획본부에서 연구 용역으로 참여했던 ‘서울시 토지자원 활용 카드’를 참고해 제작했어요. 사이트 조사 단계에서 제작된 점이 동일했고, 평가 항목도 있었거든요. ‘분석 리포트’가 필요하다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니 과거 경험들 중에서 쓸 만한 걸 찾아온 결과였어요.
천지혜
그래서 일반적으로 작성하는 건축 답사지의 틀과는 또 달랐어요. 해역과 수역의 범위, 해역 시설 대비 상부 시설의 비율 등의 고민들이 있었고요. 비화가 있는데, 당시 한 타이어 회사 광고 중에 육각형 레이더 차트를 이용한 장면이 있었어요. 타이어 별로 강점이나 균형점을 설명하면서요. 그 차트를 보고서에 활용했어요.
장혜인
영감을 얻으신 거군요.
천지혜
이 6가지 팩터가 재미있는데요, 마리나 설계에 필요한 기본 요소들이면서도 우리 사이트 상황에 적극적으로 참고할 만한 기준들이기도 해요. 북항 마리나는 부산역에서 가까우니까 접근성을 알아보아야 했고, 고가의 선박과 요트를 다루는 마리나를 공공이 즐기려면 이용 측면의 개방성도 알아볼 필요가 있었고요. 생존 수영장과 스킨스쿠버 풀 등의 특화 프로그램을 고려 중이었는데 다른 마리나에도 이러한 플러스 알파 개념의 시설이 있는지, 있다면 어떻게 운영하는지도 조사하고자 했죠. 이외에도 기본 시설 규모는 얼마나 되는지, 기능 시설은 이용하기에 편리한지, 클럽하우스나 식당과 숙박 등 지원 시설은 다양한지 등을 기준으로 삼았어요. 이러한 지표들을 만들어 저희 나름대로 점수를 매겨본 것이죠.
오가영
차트를 쓰면서도 반신반의 하긴 했어요. 건축에서는 이런 식의 분석을 잘 안 쓰잖아요. 11곳을 답사한 결과로 설계안의 타당성을 뒷받침할 데이터가 잘 나와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면 어쩌나 하고요.
오정택
사실 이 차트를 만들기 전까지는, 저도 가영도 ‘이게 될까? 뭐가 나오나?’ 그런데 작성을 마치는 순간,
오가영, 오정택
(동시에) 규모 순으로 정렬하면 나오겠다. 이거 되겠다.
천지혜
다녀와서 모아보니 굉장히 재밌더라고요. 시설 규모 순으로 나열해 보니 제일 작은 네덜란드 마리나(WSV DE Spiegel)와 제일 큰 모나코 마리나(Yacht Club de Monaco), 두 곳의 유사점이 눈에 들어왔어요. 특화 프로그램이 경쟁력을 크게 갖추고 있고, 기능 시설 편의성이 높죠. 무엇보다 주목했던 건 두 마리나 모두 본인들의 특화 프로그램을 설명할 때 ‘삶에 깊이 관여하는 마리나, 삶의 한 요소로서 요트 문화’를 공통으로 강조하던 모습이었어요.

박재완
네덜란드 WSV DE Spiegel은 완전한 지역 밀착형 마리나예요. 공공이 운영하는 소규모 마리나로서 요트 문화를 기반으로 한 교육이나 축제 등 여러 방면으로 지역 커뮤니티 결속에 일정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어요. 인터뷰 시작 전 마을 당구장 사장님께서 일단 앉아서 술부터 들라고 하셨는데, 털털한 농부 아저씨의 환대를 받는 기분이었달까요. (웃음) 사장님은 ‘지역에 맞는 마리나’를 가지도록 제언하셨어요. 한편 모나코 Yacht Club de Monaco는 초호화 대형 선박을 다루는 리조트형 마리나로 클럽의 회장님을 인터뷰할 수 있었는데, 마리나란 “류 드 비(Lieue de vie)”, 즉 ‘삶의 장’이라는 말씀을 들었어요. “보트와 선박만 정착시켜주는 마리나는 생활과 단절된 것이다. 세계 최정상급 마리나로서 우리가 가장 주의를 기울이는 일은 지역 주민과 어린이들에게 카누와 요트를 제공하는 것”이라고요. 그러면 지역 관련된 미팅도 수행하느냐고 재차 묻자 “그게 없으면 마리나가 아니다”라고 강조했고요.

천지혜
사전 분석 자료와 답사에서 나온 화두를 취합하자 완전히 다른 성격과 위치에서 접점이 생긴 거죠. 가영 님과 정택 님이 꼼꼼히 리서치 해준 덕에 나중에 결론 내기도 좀 더 쉬웠어요.
오가영
국외 답사를 통해 ‘생활형 마리나는 규모에 관계없이 그 지역에서 시민들의 생활에 밀접하게 관련이 있고 중요하다’는 분석을 도출했고, 북항 마리나에 이 분석 결과를 대입해 보니 ‘시민들이 잘 사용할 수 있는 프로그램 도입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그에 따라 추가 프로그램으로 고려하고 있던 생존 수영장과 스킨 스쿠버 풀을 설계안에 매끄럽게 안착시킬 수 있게 되었어요. 결론이 들어맞는 순간 굉장히 신기했고, 또 좋았어요.
박재완
추가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타당성을 보고서에서 해소할 수 있어 다행이었어요. 프로젝트를 진행하다 보면 객관적인 분석이나 논리가 한 부분 적절히 뒷받침해 줘야 해요. 현상 설계 때는 “해안선 1%”라는 숫자가, 중간 설계에서는 답사 보고서들이 한몫했던 거죠. 든든한 기분이었어요.
천지혜
이건 정말 정택 님과 가영 님의 날선 분석이 명료하게 맞아떨어진 덕분이에요.
요트 파빌리온 계획

박재완
가영, 계획안에 했던 수변 카페 설계도 이야기해 줘요.
오가영
지혜 님이 수변 카페를 파빌리온 형태로 계획해 보라고 하셔서 맡게 되었었어요. 그때 저는 정말 햇병아리 신입사원이어서 얼추 뭔가 해 보겠다며 가져는 갔는데, 말을 정말 못했거든요. 지혜 님께서 “계획안을 설득할 때는 프로그램 분석, 계획안의 당위 등을 설명해야 된다”고 조곤조곤 알려주셔서, 어린 마음에 그날 잠 못 이루고. (멋쩍은 웃음) 마음을 다잡고 요트 교육 과정을 꼼꼼하게 스터디해서, 그다음 회의에서는 요트 교육에 필요한 공간들을 설명 드리고, 설계에 필요한 사항들을 차근차근 말씀드릴 수 있었어요. 그런 뒤 재완 님이 디자인을 한 번 잡아 주셨는데, 편형한 매스로 다듬어졌던 것이 기억나요.
천지혜
수변 카페 사이트를 평지로 알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미묘한 레벨 차가 있었던 대지였어요. 건너편 오페라하우스에서 카페를 바라볼 때 더 낮은 눈높이에서 보여야 했는데 처음에 대지 모형을 맡았던 친구가 그 레벨 차를 못 맞추고 어려워했겠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됐죠. 가영에게 보였더니 다시 만들어야겠다고 해서, 그 부분 콘타만 처음부터 다시 만들었어요. 레벨 계획서부터 전부 다시 떠서요.
오정택
맞아요. 전체 모형에서 그 부분만 잘라 내고, 가영 님이 새로 만든 부분을 끼워 넣었었죠.
박재완
여기 파빌리온의 녹화된 지붕이 오페라하우스에서 보이도록, 그래서 오페라하우스가 갖는 경관에 지장이 없도록 높이를 최대한 낮추어 계획안을 디벨롭했죠. 그래서 파빌리온 형상 자체가 어디에서든 잘 보이도록 의도했어요. 현장에 와서는 주변에 배기탑이 들어서면서 아쉽게 됐지만요.
오가영
그래도 저는 수변 카페가 들어서는 이 알맹이 땅이 우리 설계 범위 안에 같이 묶여 있었다는 사실이 좋았고, 재미있었어요. 마리나를 계획하면서 마리나에서 바라보는 오페라하우스를 생각했었지만, 반대로 오페라하우스에서 보는 마리나도 생각할 수 있겠죠. 이 수변 카페는 오페라하우스와 가깝지만, 마리나와 같은 어휘를 가지는 한 쌍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또 다른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을까 생각해요. 작으나마 별도의 대지에서 이를 염두하며 계획하는 일은 또 다르니까요. 마리나를 가장 멋진 곳에서 바라볼 수 있는 장소라고 생각해요.


요트 파빌리온은 마리나 클럽하우스 건물과 오페라하우스를 연계하는 디자인 및 프로그램으로 계획되었다.
모형 제작 과정
장혜인
프로젝트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가 모형인데요. 중간 설계 단계에서는 언제쯤 제작되었나요?
오가영
도중에도 스터디용으로 많이 만들었었고, 마지막 모형은 중간 보고 준비하면서 만들었었어요. 당시 설계1본부는 무조건 모형을 만들어야 했는데, 특히 (김)동관 님과 재완 님 팀이 모형으로 유명했어요. (웃음)
박재완
지금은 회사에서 모형을 잘 안 만드는 분위기가 됐지만요. 마지막 모형은 여기 가영 님과, 지금은 퇴사한 김부빈 님이 만든 모형이었어요. 그동안 수많은 모형을 만들어오긴 했지만 ‘왜 만드는지’ 절절하게 느끼기로 손에 꼽는 순간이었어요. 건물이 이렇게 큰 줄 그때 처음 실감했고, 디테일 이전에 공간에 부여하는 성격이나 필요한 상세 계획들이 비어 있었음을 겨우 알았던 거죠. 중요한 역할을 해준 모형이에요.
천지혜
제작하기 전에 축척을 정하잖아요. 우리 건물은 양 옆으로 길다 보니 기왕이면 크기가 좀 컸으면 좋겠다고 요청했거든요. 그럼 A1 종이 규격으로 제작해도 594×841mm인데,
오가영
그랬더니 건물이 반으로 잘리고 있었죠.
천지혜
그래서 거의 A0 크기까지 갔어요. 가영 님이 캐드 화면을 촥 펼치는데… 속으로는 ‘헉’하고 놀랐지만 짐짓 의연하게 “그래. 가영아. 좋다. 이렇게 가자.” (일동 웃음) 규모만큼 하중도 꽤나 나가는데 모형을 고정할 만한 판도 마땅히 없었어요. 둘러보니 900×1800mm 크기의 회의실 탁자 하나가 남길래, 설계1본부장이었던 전상우 님께 ‘테이블 하나쯤 없어도 되죠?’ 하면서 양해를 구하고, 정택이 드라이버를 들고 와 테이블 나사들을 하나씩 풀었죠.
박재완
평소처럼 우드락으로 바닥을 만들기엔 모형이 여간 무겁지 않았으니까요. 테이블에 색지 바르고 그냥 붙여버렸죠.
천지혜
디테일 수준만 놓고 보면 사실 중간 보고용 모형은 이렇게까지 만들지 않아도 돼요. 다만 우리가 공간감을 실감하면서 도면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스터디가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 내부도 다 확인할 수 있도록 만들다 보니까요. 가영은 특히 공간을 다 이해하고 모형을 만드는 친구라 도움이 정말 많이 됐어요.
박재완
모형은 뚜껑을 열고 닫듯이 조립과 분리가 가능했어요. 그렇게 만들려면 수평으로 건물을 어떻게 층층이 나눌지도 계획이 필요하고, 실내 마감재까지 입혀야 하니 작업 난이도가 굉장히 높아지거든요.
오가영
3D 모델링에서 볼 때와 육안으로 물리적인 공간을 체험할 때가 다르잖아요. 완성된 모형은 보통 겉모습만 쉬이 둘러보고 말지만, 만드는 입장에서는 속속들이 공간감을 느끼게 돼요. 모형 작업에서 재미를 느끼는 부분이에요.
오정택
그 가치가 있는 거죠. 건축가 알바로 시자를 다룬 『엘 크로키』중 스페인 판티코사(Panticosa)에 지은 스포츠 센터 모형 사진을 표지에 크게 넣은 권호가 있어요. 예전에는 ‘모형을 뭘 이렇게까지 만든담’ 했는데, ‘이 정도로 고민을 많이 한다’는 어떤 선언이었겠더라고요.
주 52시간제, 서로 도우며 일하기
오정택
그러면서 저는 항상 자신 있게 말하는 게, 이만큼 해내면서도 주 52시간제는 지켜냈다는 거예요.
천지혜
지켰나요?
오정택
네. 한 98% 지켰던 것 같습니다. 그것도 저는 가치를 높게 사고 싶어요.
박재완
다들 밀도 있게 일했죠.
오가영
그때 팀원들 스케줄 관리가 굉장히 잘됐었어요. 모형 제작 기간도 거의 한 달이었는데 그것만을 위한 일정표가 따로 있었을 정도였어요. A3로 출력된 일정표에 모형 크기 정하기, 다음 날 목업해 보기, 레이저 작업에 필요한 일들 사전에 준비하기, … 일련의 단계들을 재완 님이 매일 확인해 주셨어요. “오늘은 어디까지 했니? 1층 했니?” (일동 웃음) 모형 제작도 그 정도로 촘촘하게 관리해 주셨으니 가능했던 거예요.
박재완
모형이 크면 클수록, 자칫 했다간 기한 내에 못 만들거든요.
천지혜
그걸 포함해서 팀원들 모두에게서 ‘시간 안에 잘 해보자’는 몰입을 느꼈어요. 이 친구들 화장실은 대체 언제 다녀오나 싶을 만큼 대부분의 시간을 계속 앉아서 작업하더라고요.
오가영
그러다가 누가 슬쩍 다가와서 기둥 썰어 주고 가시고. (웃음) 정택 님이었던가요? 톱으로 기둥 썰어 주시고, 사포도 갈아 주고.
천지혜
그랬죠, 오며가며 잘라 주고 가고. (웃음)
오정택
그러니까 그런 게 좋았어요. 누구든 하루 일과가 조금 일찍 끝나거나 하면 주변을 한번 돌아보았던 것 같아요. 바쁜 친구가 있으면 이렇게 가서, 도와주는 척 수다 떨면서 방해도 살짝 하고. (웃음)
마치며
장혜인
마치면서 팀원 분들의 소회를 들어볼게요. 가영 님부터 말씀해 주시면.
오가영
저는 기룡 님 바톤 이어받고 중간 설계부터 투입된 멤버였는데, 다들 ‘어벤져스’라 부르고 싶을 만큼 팀워크가 잘 맞았던 사람들이었어요. 영빈 님도 정택 님도 너무 잘하시는 분들이라 부담되기도 했는데 스스로가 가능한 역할에서 최선을 다 하자는 태도로 임했었어요. 모형이 그 중 하나였고요. 학부생 때도 모형 제작은 워낙 좋아했었고 그래서 잘 만드는 법도 나름 터득했었으니까, 그걸로 팀에 도움이 되었지 않았나 해요.
천지혜
가영이 당시 2년 차였죠? 우리 건물이 만만찮은 복합시설인데, 저연차였음에도 어려운 프로그램과 어려운 건물을 잘 이해하고 소화해준 덕분이에요. 모형뿐만 아니라 파빌리온 계획이나 답사 보고서 작성까지 폭넓게 활동해 주었으니까요. 프로젝트 진행 자체를 풍부하게 해 준 키맨이었어요.
오정택
저는 14년도 신입사원이니까, 4년 차 정도 되었을 때인데요. 현상 설계 평면을 마리나 프로젝트에서 처음 맡게 되었는데 심지어 프로그램도 다양했었어요. 그렇다 보니 아직 접해 보지 못한 종류의 도면도 있었던 거예요. 호텔 그리는 오정택, 레스토랑 그리는 오정택, 예식장 그리는 오정택이 한 명씩 필요했고… 그 당시 팀의 목표도 ‘중간 도면 그대로 상세 도면 작성이 가능한 수준’을 만들어 보자는 것이었어요. 도면에 정보란 정보는 정말 있는 대로 다 넣었던 것 같아요. 표현한 적은 없지만 새로운 일에서 잘 모르는 부분도, 능력 밖의 일도 많았던 과정이었어요. 그럼에도 태연히 일을 잘해낼 수 있도록 스스로 공부한 적도 많았고요. 다양한 프로그램을 알 수 있어 재미있었지만, 한편으로 일에만 너무 파고들었던 건 아닌가 해요. 지나고 나니 위아래 사람들을 많이 살피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더라고요. 제 역량이 더 좋았다면 가영 같은 팀원들이나 소장님들과도 더 많이 이야기 나누며 재미있게 갈 수 있었을 텐데, 그런 부분을 많이 챙기지 못했다는 생각이 커요.
오가영
그래도 정택 님이 우리 팀의 분위기 메이커였는걸요. 질문도 다 받아주셨는데, 그냥 알려주시는 게 아니라 이 도면을 왜 그려야 하는지부터 차근차근 다 설명해주셨어요. 저희 다들 정택 님에게 많이 배워서 이만큼 계획할 수 있었던 건데요.
오정택
음, 그랬나요. (웃음)
천지혜
너 참 잘 가르쳐. 나중에 가영 같은 제자들을 협력사로 만나. (웃음)
정림 피플앤웍스 시리즈 『N.2 부산항 북항 마리나』에서 발췌
천지혜. 2008년 정림건축에 입사했다. 일산 요진 와이시티 복합개발, 리비아 트리폴리 워터프론트 개발, 영종하늘도시 오피스텔 신축설계, 용인 SK아카데미 마스터플랜 및 리모델링에 참여 또는 진행 중이다. 부산항 북항 마리나 현상 설계, 본 설계 용역. 디자인 감리까지 TL(team leader)로 참여했다.
박재완. 프랑스 빠리-벨빌 국립건축학교에서 도시계획과 건축설계를 배우고 2007년 정림건축에 입사했다. 현대해상 하이비전센터, 아모레퍼시픽뷰티 제2사업장, SK기념관 등을 수행했으며 한국건축문화대상 대통령상(2017), 한국건축가협회 BEST 7 협회상(2017) 등을 수상했다. 부산항 북항 마리나 프로젝트에서는 현상 설계부터 현장 디자인 감리에 이르는 전 과정에 참여했으며, DP(design principal)로서 디자인과 기술적인 부분을 주로 담당했다.
오정택. 2014년 정림건축에 입사, 부산항 북항 마리나를 비롯해 SK기념관, 삼성전자 메가스토어 대전 본점 등을 수행했다. 부산항 북항 마리나 프로젝트 당시 현상 설계부터 중간 설계 마무리 단계까지 참여했다. 현재 플로르건축사사무소를 운영 중이다.
오가영. 2018년 정림건축에 입사해 SK하이닉스 이천 M16 설계용역, 부산항 북항 마리나, SK서비스에이스 이전사옥 인테리어 설계용역 등에 참여했으며 디자인 기획 업무를 거쳐 현재 빅테크 BU에서 근무 중이다. 부산항 북항 마리나 중간 설계 단계에 합류했다.
정림건축 디자인위원회 대담: 들어가며
중대형급 이상의 건축사무소는 자본 논리로 구축되는 사업성과, 사용자와 도시를 대하는 공공 이데올로기 사이에서 그 균형을 찾기 마련이다. 건축주의 요구를 충실히 이행하는 동시에 건물이 지닌 사회적 가치와 공공적 자산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은, 정림건축이라는 ‘집단’이 창설된 초창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 고민해온 지점이기도 하다. 공공성이란 건축과 도시 환경을 일구는 이들이라면 기본적으로 갖추게 되는 태도이나, 거친 아이디어일지언정 이를 끝내 구현해내는 일, 나아가 한 사무소의 특성이라 손꼽을 수 있을 만큼 포트폴리오가 쌓이는 일은 또 다른 차원이다.
생각공장 프로젝트를 필두로, 정림건축 디자인위원회에게 ‘공공성’에 대해 물었다. 정림건축이 생각하는 공공성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으며 어떤 방식으로 구현되어왔는지, 현대 한국 건축에서 (그리고 실무에서) 공공성이라는 화두는 어떻게 인식될 수 있을지를 들어보았다.
참석. 기현철, 김경훈, 김동관, 김유나, 박재완, 이명진, 이호, 홍성현
진행. 장혜인
정리. 윤솔희
공공성이란 무엇인가
장혜인
시간을 마련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는 한국 현대 건축 계보에서 공공성은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 당산동 생각공장을 비롯한 정림건축의 프로젝트에서는 이 공공성이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를 말씀 들어보고자 합니다. 먼저 어떤 프로젝트부터 이야기해볼까요?
기현철
공공기관에서 발주한 프로젝트 외에 상업시설부터 보면 좋겠습니다. 하남 스타필드, 영등포 타임스퀘어에서 공공성은 무엇이었을까요? 이 두 프로젝트는 은연 중에 정림건축의 대표작으로 자주 거론되지요. 규모가 커서, 유명한 클라이언트라서 그럴 수도 있지만 저는 좀 다른 생각이 있습니다. 저희 집이 스타필드 고양과 가까이 있어 자주 방문하는데요. 그곳에 갈 때마다 쇼핑객뿐만 아니라 만보기를 차고 걷는 어르신, 뛰어다니는 어린이,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반려가족들을 봅니다. 다양한 이들이 어울려 각자의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지요. 어쩌면 이러한 풍경이 공공성을 이해하는 실마리가 되지 않을까요? 저는 공공성이란 유료와 무료, 소유의 개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개인 차원에서 가질 수 없는 것을 여럿이 향유할 수 있는 상태라고도 봅니다.
김동관
저도 스타필드에 자주 가는데요. 마당, 공원의 위치와 규모, 공용공간의 폭 등이 적절해 계속 머무르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고요. 저녁 때 가보면 정말 좋아요. 그 모습을 보면서 반드시 공공기관의 프로젝트여야 공공성을 구현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느꼈어요. 이 맥락에서 저는 정림건축 앞 상공회의소 건물도 정말 좋아합니다. 준공한지 벌써 20년이 넘었을 텐데 여전히 1층 로비는 쾌적하고 남대문과의 버퍼 영역이 잘 설정돼 어색함이 없어요. 재료 선택이나 야외 공간 배치 등은 지금 봐도 촌스럽지 않고 아름답죠.
김경훈
해묵은 주제인데도 공공성은 여전히 뜨거운 주제죠. (웃음) 시대에 따라 공공성을 보는 관점이 달라져 왔기 때문일 텐데요. 스타필드를 바라보는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그곳의 넓은 복도와 큰 보이드를 공공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보다는 수용인원이 많아야 하니까, 더 많은 사람들이 머물러야 하니까 더 크고 넓게 짓는 데에 목적이 있었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경험의 질을 우선시하는 요즘 트렌드와 공공성이 맞닿은 사례이죠. 하지만 그 틈에서 배울 건 분명히 있습니다. ‘일반 근린생활시설에서 상업성과 공공성을 어떻게 연결 지을 수 있을까? 관리 주체가 명확한 대형 상업시설과 달리 관리 주체가 불분명한 중소형 상업시설에서 지속 가능한 공공성이란 무엇일까? 어떤 의미로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같은 이상을 위해 다른 건축물이 처한 상황과 클라이언트의 관점을 복합적으로 분석하면서 말이에요.
박재완
이런 생각도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공공성이란 가치를 과잉 소비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일례로 프랑스 유학 시절 도시계획 시간에 과제를 발표하며 ‘세미-퍼블릭 스페이스’를 언급한 적이 있어요. 그랬더니 교수님이 “세미-퍼블릭이 뭐죠? 한국에는 그런 게 있나요?”라고 되묻더군요. 그것의 운영 주체, 관리 주체는 누구냐고 물으면서요. 정림건축 포트폴리오를 보면 프로젝트 둘에 한 번 꼴로 세미-퍼블릭 스페이스가 등장합니다. 그만큼 관대하죠. 그래서 저는 우리가 사용하는 공공성을 조금 더 냉정하게, 더 강하게 말하면 의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상업성을 효과적으로 보완하는 요소로서 공공성이란 말을 붙이는 건 아닌지, 공공성 추구가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기에 상위에 올려둔 건 아닌지. 우리의 방향성을 점검하는 과정이 필요하죠.

김유나
정림건축이 생각하는 공공성이란 무엇인지 솔직하게 직시할 필요가 있다는 말씀에 공감해요. 장소만들기(placemaking)에 기반해 커뮤니티 형성을 지원하는 뉴욕 비영리단체 ‘공공공간을 위한 프로젝트(Project for Public Spaces)’는 공공성을 만드는 10가지 요소를 <파워 오브 텐(The Power of 10+)>이란 제목으로 정리했어요. 앉을 수 있는 곳, 뛰어놀 수 있는 놀이터, 만질 수 있는 예술, 들을 수 있는 음악, 먹을 수 있는 음식, 경험할 수 있는 역사, 만날 수 있는 사람 등이 포함되죠. 저는 공공성이란 사람들 사이에서 공유되는 경험이고, 건축가의 역할은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모일 수 있을지를 디자인하는 일이라고 봐요. 그러니 공공성을 만드는 데 정량적인 법적 근거, 예컨대 ‘5%의 공개공지를 만든다’가 절대 목표가 아니라 그 공개공지에서 어떤 사람들이 무슨 활동을 할 수 있는지를 그려내고 제안하는 게 중요하단 거죠. 또 대중과의 커뮤니케이션 측면도 고려해야 해요. 예를 들면 미국에는 공개공지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웹사이트가 있어요. 위치, 운영주체, 관리자 정보 열람뿐만 아니라 문의접수도 하죠. 우리나라 일반 대중은 공개공지란 개념도 낯설어하는 게 현실이에요.
홍성현
한국 현대 건축에서 광장은 실제 공공성을 위한 제안이기보다는, 말씀하신 것처럼 실무에서 인허가를 통과하기 위한 법적 도구에 가까웠죠. 그렇다면 이러한 현실 또한 한국 현대 건축의 조건과 언어로 해석해야 하지 않을지요.
기현철
우리 정서에 맞는 공공공간 유형 개발 역시 활발하게 일어나야 한다고 봅니다. 서구권의 광장, 플라자를 공공성의 공간화 모델로 참조하면서 두레마당, 어울림 마당 등을 만들고 있지만 이들은 사실 활용도가 굉장히 낮거든요.
김유나
동시에 법규 보완도 필요할 테고요. 현행 제도는 경관적인 측면에서만 성과를 요구하고 있거든요. 앞으로는 현대 건축에서 공공성을 확보할 때 어떤 고민과 제안이 따라야 하는지 지침이 필요할 것 같아요.
박재완
서울 마곡지구에 신축 건물이 늘어나며 공개공지가 많이 생겨났지만, 이용 면에서는 아직 미지수예요. 공공성을 위한 공공공간은 그저 만드는 것만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누구를 위해’ 등의 단서를 구체화하는 과정이 설계 단계에서부터 이뤄져야 해요.
김유나
그런 면에서 당산동 생각공장의 선큰 광장이 매우 인상적이었어요. 앞으로 생각공장 입주자들이, 일대의 주민들이 이곳에서 어떤 일을 펼칠까 궁금해질 정도로 구체적인 공공성이었어요.
이명진
지식산업센터란 유형은 쉽게 말해 ‘신식’이죠. 요즘 생긴 프로그램이잖아요. 도심 활성화를 위해 도입된 개념인데 분양이란 1차적 목표가 있다 보니 대개 규격화, 표준화에 맞춰져 있어요. 당산동 생각공장의 선큰 광장은 그 틈에서 탄생한 공공성이라 더욱 재미있는 것 같아요. 상업적 가치를 충족하면서도 공공성을 입체적으로 해결한 건축적 해법이 돋보이죠.


정림건축은 공공성을 어떻게 만드는가
이명진
저는 공공성이란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특별한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같은 장소에 같은 기억을 가진 이들이 공동체이고 건축가는 그 과정에 기여해야 한다고 봐요. 상업시설 설계에는 특수한 목적, 그러니까 재화 판매를 위한 로직이 존재해요. ‘시계는 가린다’, ‘재화와 복도 사이 거리는 이 정도가 적당하다’, ‘고개를 들었을 때 위층 상점 간판이 보여야 한다’ 등의 기본 지침들이 철저하게 상거래에 맞춰져 있죠. 공공적 이벤트 역시 결과적으로 장사가 잘 되게 하려는 목적을 기저에 깔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거예요. 다만 가치 소비, 경험 소비라는 현대 트렌드가 맞물리면서 상업시설을 짓는 건축주들도 사람들이 편안하게 머물 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건축적 노력을 하고 있다고 봐요. 결국 건축가는 상업의 논리, 개인(클라이언트)의 니즈 등 어느 한 쪽 입장에 편중되지 않고 공공의 안녕과 행복, 도시적 맥락, 나아가 역사성과 시간성까지 더해 시공간적 가치를 버무려 주는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바로 그곳에 정림건축이 해야 할 일, 그리고 공공성에 대한 태도가 있다고 봅니다.
김영훈
공동주택 설계나 복합 단지 설계에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대중의 안목은 높아졌고, 문화를 사고 파는 것이 트렌드이잖아요. 누구나 자신의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려고 노력하죠. 도면 앞에서 우리는 가치 있는 시간을 만들어줄 공간이란 과연 무엇인지 계속 고민하며 그려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명진
공공성을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개발사의 시각과 자세도 중요해요. 일본 모리 빌딩의 경우 프로젝트 기간이 20~30년 가량 된다고 합니다. 일본 정부와 개발사, 설계사 등이 주민 또는 상권협의회와 만나는 횟수는 1천 번이 넘어간다는군요. 이 지역을 어떻게 개발할지, 상생하는 방안은 무엇일지 긴 시간 동안 자주, 테이블에서 함께 논의하는 것이지요. 본질적으로 운영이 잘 되는, 지속 가능한 공공성은 이 시간에서 탄생한다고 봅니다.

김경훈
750개의 개인 상가들이 밀집한 김포 라베니체 프로젝트에서 정림건축이 만드는 공공성은 대지로의 접근성을 높이는 과정에서 발현되었다고 봐요. 오래 방치된 땅을 매입한 클라이언트는 이번 투자로 일대의 활기를 만들겠다는 의지가 분명했는데 문제는 지구단위계획상 대지와 도시가 연결될 수 없다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어요. 이 과정에서 정림건축은 역으로 김포시에 지구단위계획 수정을 요청하면서 공공과 민간 모두 윈윈할 수 있는 디자인을 제안했어요. 양측의 이견을 설득과 합의로 봉합하면서요. 저는 이 과정을 통해 우리가 만드는 공공성이란 공공이 참여할 수 있는, 그러니까 공공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드는 데에 있음을 느꼈어요. 건축가라면 클라이언트의 의지로 구현 가능한 공공성에만 만족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김영훈
파라스파라 프로젝트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군요. 2012년 북한산 국립공원 내에 짓는 유일한 리조트로 설계에 착수했는데 프로젝트 도중 인허가 특혜 시비에 휘말려 8년 동안 방치해야 했어요. 끝내 조선호텔앤리조트가 대지를 인수해 파라스파라 리조트로 구현했는데, 저희는 설계 단계에서 대척점을 이루는 요청들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아야 했어요. 서울시와 강북구청의 관심은 공공성 구현, 클라이언트의 관심은 사업성이었거든요. 이 팽팽한 줄다리기 속 장력을 견디며 건축물의 형태, 공공영역, 운영방식 등 다각도로 공공성을 메꿔 넣는 것이 저희의 일이었어요.

박재완
당산동 생각공장 저층부는 두 가지 레이어를 갖고 있어요. 지하 1층으로 향하는 선큰 광장은 업무시설로 향하는 사적인 레이어, 지상 1층은 도시의 길로 공적인 레이어죠. 그 사이의 균형이 이 땅의 전체적인 안정성을 만들어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당산동 생각공장을 보고 저는 공공성이 냉철한 관점에서 더욱 명확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땅을 비워 놓으면 아이들이 와서 놀겠지, 사람들이 머무르겠지’ 이런 생각은 공상에 그치기 쉽다는 것을요. 그런 부분에서 당산동 생각공장이 도심에 공공성을 자연스럽게 구현한 예시가 아닌가라고 생각해요.
이호
돌아보면 정림건축 디자인위원회 시간에 가장 자주 하는 말도 땅과의 관계인 것 같아요. 건축물의 배치, 땅을 쓰는 방식에서 주변과의 조화를 늘 추구하죠. 이게 정림건축이 공공성을 대하는 태도 같아요. 제가 이대서울병원 프로젝트 설계에 참여할 당시 증축 부지를 어디로 둘지가 첨예한 이슈였는데 정림건축은 단번에 결정했어요. “앞을 열어줘야 하지 않겠나?”라고요. 당산동 생각공장에서도 도시를 단절시킬 만한 거대한 매스를 요구 받았지만 그것을 쪼개고 나누고 연결해 도시의 길을 만든 셈이잖아요. ‘우리가 설계한 건물로 이 도시를 완결 짓지 않겠다, 앞으로의 변화에 순응하겠다’는 태도를 잘 드러내는 사례였다고 생각해요.
정림 피플앤웍스 시리즈 『N.1 생각공장』에서 발췌
부산항 북항 마리나 설계팀 대담: 현상설계
부산의 해안선은 약 150km에 이른다. 도시 성장과 매립지 개발로 인한 변화를 겪으며 대부분은 공업 및 상업 지구가 차지하고 있지만, 한편으로 녹지, 주거, 해수욕장, 친수 시설 등으로 조성되어 있기도 하다. 마리나가 들어설 대지의 해안선은 길이 1.5km에 달한다. ‘공공 시설’로서 주어지는 해안은 부산 전체 해안선의 1%에 불과한 셈이었다. 설계팀은 공공에 주어지는 해안의 희소성에 주목했다.
일시. 2023년 8월 9일 13:00 – 14:00
참석. 박재완, 천지혜, 오정택, 정주현, 김기룡
진행. 장혜인
1. 브레인스토밍 티타임
2. 계획 단계 보고서 분석
3. 대지 방문기
4. 실현되기 전의 건물을 전달하는 방법
5. 마치며

부산 시민과 대중에게 “공공을 위한 1퍼센트”의 해안을 마리나 시설로써, “해상 공원을 선물하겠다”는 모토로 작성되었다. ‘호안을 들어올리’는 디자인으로 매립지가 지닌 형태를 반영하면서 부산의 건축적 지형 및 랜드마크와 어우러질 수 있는 점진적 수평성이 특징이다.
브레인스토밍 티타임
천지혜
오전 티타임 이야기부터 시작하면 될 것 같아요. 이걸 보시면 되게 재밌어요. 저는 “브레인스토밍”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기억 나세요? 6~7월에 세 분이서 진행하시다가 8월에 저와 (박)영빈이 합류하고, 그다음 (김)기룡이 합류했죠.
박재완
처음에 팀원 세 명이었을 때, 아침에 출근하면 가운데 A3 종이 깔아두고 둘러앉아서, 자기가 관심 있게 봤거나 좋아하는 이미지를 서로 나누면서 서로 수다 떠는 시간을 보냈었어요. 이미지는 이 프로젝트와 관계 있어도 되고, 없어도 돼요. 그러면서 나왔던 좋은 이야기들이 이후 과정에서 빛을 발하기도 했죠. 팀원들도 서로의 성향을 자연스럽게 알아갈 수 있었고요.
정주현
매일 아침 9시였죠. (웃음) 프로젝트 팀마다 회의 테이블이 하나씩 있었어서, 모니터에 사진 하나씩 띄우면서 티타임을 가진 거죠. A3 종이 뭉치에 (박재완) 소장님이 ‘이런 얘기들을 했었지’ 하시면서 그리고 또 쓰시고, 그렇게 남은 기록들을 스캔도 해 두었었어요.
사실, 저희는 그 이미지들을 업무 도중에 따로 준비해가야 했어요. 하루 일과 다 마치고 나면 ‘맞다, 그거 해야지’. (웃음) 왜냐면 마침 주 52시간 근무제가 시작된 시기였거든요. 야근하는 요일을 정해두는 등으로 시간 내 업무를 마칠 수 있도록 (박)재완 님께서 저희 일정을 조절해 주시던 때였어요. 당시에는 둘을 병행하기가 조금 힘들었는데, 나중에 보니 그 시간이 저희로 하여금 계속 생각을 하게 만들어준 동력이었더라고요. 어찌 보면 회사에서는 내게 주어진 일만 할 수도 있잖아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리프레시하면서, 또 다른 아이디어가 나올지 재완 님이 질문을 계속 건네주신 셈이에요.
장혜인
재밌었겠네요. 그렇게 다같이 모여서 말랑말랑한 이야기들 톡톡 나누는 중에 좋은 게 많이 나오잖아요.
박재완
티타임을 만든 건 개인적인 경험 두 가지가 합쳐진 것인데요. 하나는, 파리에서 아틀리에를 다닐 적에 점심 먹으러 가면 식탁에 놓인 종이에 스케치하면서 프로젝트 얘기를 계속했었어요. 그럼 그 스케치 그대로 사무실에 가져와 도면으로 옮기곤 했죠. 다른 하나는, 학생일 때 프랑스 건축사회 회장을 역임했던 교수님 수업에서였어요. 그분은 학생들에게 일주일 간 작업한 것을 A3에 갖고 오라고 하셨었는데, 우리 발표를 들으시면서 그 A3를 한 장씩 넘겨보시다가 ‘이건 왜 디벨롭이 안 됐니? 여기에는 왜 이 이야기가 빠져있지?’ 내지는 ‘이 아이디어는 너무 좋은데?’ 등으로 크리틱을 주고받는 방식이었죠. 그러면 일주일 간 쌓인 작업 중 가치 있는 아이디어들이 빛을 보게 돼요. 거꾸로 말하면, 좋은 생각들을 발전시킬 기회가 없을 뻔했다는 뜻이기도 해요. 우리 팀원들의 좋은 생각들도 그런 식으로 꺼내어 프로젝트에 반영하고 싶었어요. 아침에 커피도 마시면서. (웃음)
오정택
현상 설계 하면서 제일 곤란해지는 경우가, 각자 대안을 내다 보면 기준이 따로 없어서 취사선택이 필요할 때 무엇이 좋다, 나쁘다고 뚜렷하게 말하기 어려워질 때예요. 모두가 자기 대안의 좋은 점을 이야기하니까요. ‘함께 만들고 합의한 방향성에 따라 이것·이것·이것은 기준이니, 그에 따른 대안을 내자’고 진행하면서 무엇이 더 타당하고 가능한지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던 게 좋았어요. 이러한 논의 구조나 콘셉트화 프로세스를 확립해 주신 것이 제게는 새로운 경험이었어요. ‘나도 나중에 이렇게 해봐야겠다’는 생각도 많이 했고요.
박재완
공동의 지식들로 합의된 설계 콘셉트가 나오길 바랐어요. 어느 한 명이 주도하거나, 각자가 땅에 대해 갖는 생각을 제각기 콘셉트화할 수도 있겠지만 아침마다 브레인스토밍을 통해 만들어진 공감대에서 비롯한 밑그림을 먼저 그려 나가기 시작한 거죠. 설계 대안들 역시 그 바탕에서 여러 가지가 나올 수 있도록요. 시간적 여유만 있다면 현상 설계 때 그런 과정을 거치는 게 좋은 것 같아요.
천지혜
요즘은 현상 설계 준비 기간이 보통 길어도 3~4주인데, 부산 북항 마리나는 6월에 일반 현상 공모가 나왔고 10월에 제출이었으니 주어진 기간이 100~120일 여 정도였어요. 마리나란 무엇인지 이해하고 항만 관련 용어를 알아가는 시간도 필요했다 보니… 그런 프로세스가 도움이 됐죠.
정주현
맞아요. 계류 시설은 뭔지, 그걸 설계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 그때는 전혀 몰랐으니까요. 국내에는 이렇다 할 만큼 좋은 마리나 시설이 많이 없기도 했고, 책을 구해서 보아도 정보가 자세하지만은 않더라고요. 해외 사례들도 참고하면서 공부를 많이 했었어요.
오정택
오히려 몰랐기 때문에 이런 프로세스가 유리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조심스럽게 ‘최대한 분석해 보면서 가자’는 방향이 유효했던 면도 있었을 것 같고, 잘 아는 프로그램이었다면 오히려 과정이 달랐을지도 모르겠어요.
박재완
(정)주현 님 말대로 프로그램을 알아가는 단계이기도 했고, 더욱이 시설의 기능이 분명히 작동해야 하는 특성이 있으니 어떤 추상적인 콘셉트 안에 원하는 대로 기능을 배치할 수는 없는 상황이잖아요. 이를테면 지상에 요트를 보관하는 육상 적층 시설은 마리나에서 면적을 가장 많이 차지하는 시설인데, 이것의 배치에 따른 대안을 고민했던 시기가 있어요. 대지 앞이냐, 중간이냐, 끝이냐. 그 위치에 따라 전반적인 계획도 달라지는 상황이었죠. 그러한 평면적인 운영은 달라지더라도 합의된 관점에서 비롯한 하나의 주제를 이미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각기 다른 프로그램 배치가 적용되면서 만들어질 수 있었어요.
계획 단계 보고서 분석
천지혜
마리나 기본 계획안은 현상 설계 이전 예비 검토안으로써 2011년도부터 작성되어 왔어요. 1차 안은 2011년 한국종합건축사사무소에서, 2차 안은 2013년 건일엔지니어링에서, 이후 행림+상지와 한종+건일처럼 컨소시엄 간 경쟁 구도로 작성된 안들도 있었고요. 이외에도 재개발 단지로 지정되고 마리나 건립이 확정되면서 지속적으로 갱신 검토된 버전의 보고서들이 존재해요. 얼마나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고민한 땅이었는지 실감이 되죠. 그간의 데이터를 통해 발주처가 이 땅을 어떻게 인지해 왔는지 읽어내고자 했어요.
오정택
그동안 작성된 계획안과 보고서들로부터 핵심 개념과 키워드, 콘셉트, 이를 위한 접근 방식 등을 파악해 범주화하고 분류했어요. 보고서 각 차수마다 유의미한 주제를 추출하면서 연속해서 강조되던 것들, 결국 공통적으로 호명되던 개념들을 세 가지 정도 뽑아볼 수 있었어요. 한편으로 앞선 보고서에는 없었다가 새롭게 등장한 내용들도, 근래에 필요성을 느낀 의견이 반영된 것으로 보고 주목하기도 했고요.
장혜인
1차 때 세모, 2차 때 동그라미 등으로 표기가 되어 있네요. 설계에서 적용하면 좋겠다 싶은 것들을 골라 놓으신 건가요?
오정택
적용도 적용이지만, 우리는 현상 안에서 무엇에 비중을 둘 것이며 상대 사는 무얼 중요하게 생각할지 파악하기 위함이 더 컸어요. 우리는 네모가 중요한 한편 그쪽은 동그라미를 좋아할 수 있잖아요. 그렇다면 왜 그러할지, 1~4차에 걸쳐 남의 생각 읽기를 한번 해 본 거예요.
천지혜
그런 측면에서 상대 사가 해올 것 같은 배치나 설계를 시도해 보기도 했어요. 그래야 미리 단점을 파악해 전략적으로 공격할 수도 있으니까요. RFP에서 가져온 키워드도 많아요. 이는 설계에 고려할 요소들을 추출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RFP는 곧 발주처의 언어이기도 해요. 심사 기준에 따라 채점하기 위해서든, 제출된 자료를 검토하기 위해서든 읽는 입장에서라면 같은 언어로 쓰인 자료가 보다 친숙하겠죠.
이상의 분석 작업은 정택 님이 거의 다 해 두셨던 거예요. 저는 나중에 합류했다 보니, 이렇게 다 모아두신 내용 덕분에 단기간에 프로젝트를 파악하기 좋았어요.
대지 방문기

오정택
이 사진은, 프로젝트 시작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인데요.
박재완
주현이랑 나랑,
오정택
네, 저까지 셋이서. 초기 부지 모습이에요. 당시 호안 형태 만드는 작업, 방파제 설치 작업 등이 진행되던 중이었어요. 위성 지도로 먼저 확인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도착했는데, 막상 보니 입구부터 부지까지 들어가는 깊이가 어마어마하더라고요. 때마침 날짜도 7월 22일, 한창 더웠을 때였죠. 셋이서 한여름 뙤약볕에 피부 태워가며 걷고 있자니 신호수 아주머니께서 ‘차 없이 그냥 걸어가느냐’고 걱정 어린 인사를 건네시더라고요. (웃음) 체력이 다 떨어져가던 찰나 부지에 겨우 도착했고, 그 거리감이 상당히 와 닿았어요. 이 지점에서 저기로 가려면 얼마나 들어가야 하고, 저쪽으로 가려면 또 얼마… ‘이곳은 어디서부터 몇 퍼센트 지점’이라는 감각을 체감했던 거죠. 몸은 고되었어도 수확이 많았던 답사였어요. 설계하는 내내 그 느낌을 갖고 갈 수 있었고, 특히 진입부 설계에는 재개발 단지 전경이 극적으로 드러나는 기대감을 반영하기도 했어요.
김기룡
저는 현상 도중에 합류한 팀원이라, 휴가 중에 혼자 대지를 방문했었어요. 비 오는 날이었는데, 그 일대에서 제일 높은 건물이 국제여객터미널이라 우산을 쓴 채 옥상에 올라 둘러보았죠. 회사에서 프로젝트를 할 때면 대지 주변에 고층 건물들이 들어선 경우가 잦은데 이곳은 아직 개발 중인 단지였기 때문에 사방이 트인 공간감이 좋았어요. 물류 시설이 많아 바다 건너 크레인이 움직이는 산업 도시의 풍광도 보이고 있었고요. 우리의 마리나는 이곳에 어떤 모습으로 들어서야 가장 합리적일지, 그리고 사람들도 많이 이용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며 돌아왔던 기억이 나요.
장혜인
사이트 분석 끝에 이곳을 “1%의 가치”라 함축하신 키워드가 개인적으로 재밌었어요. 마침 숫자도 공교롭고, 그것을 공공에게 돌려주자는 이야기도 인상적이었고요.
오정택
부산의 지역사를 조사하던 중 ‘부산에서 바다를 보러 갈 만한 장소는 잘 없는 것 같다’는 이야기가 나왔었어요. 부산은 6.25 전쟁 이후 도시화가 급격히 진행되면서 산지에 주거가 조성되고, 생업을 위한 산업 시설은 해안가에 형성되었어요. 그러다 보니 바닷가를 영유하기보다 활용하는 프로그램이 많아졌죠. 그래서 부산에 바다가 있다지만, 정작 부산 사람들은 이를 얼마큼이나 ‘우리 바다’라 가까이 느끼며 지낼까 싶었던 거죠.
이야기에 공감하면서 정보를 추적해보니 실제로 해변에서 바다를 향유할 만한 시설은 극히 드물었고, 그 드문 경우조차도 모두 자본을 보유한 기업과 개인이 차지하고 있던 게 현실이었죠. 그래서 시민들에게 ‘열려’ 있는 바다의 희소성이 매우 높다는 결론에 이르렀어요. 그래도 그렇지, 설마 1%일 줄은요. (웃음) 부산의 해안선 길이가 약 150km에 달하는데 저희 대지의 호안선 길이를 재 봤더니 1.5km 가량 되었어요. 정말 100분의 1이더라고요.
박재완
부산에 한동안 살았을 때, 해안가를 따라 차를 달려봐도 바다를 볼 데가 마땅히 없었던 경험이 있어요. 해수욕장에는 상업 시설이 즐비해 있고, 아니면 콘도나 호텔을 가야 하죠. 산에 오르거나 모래사장에 눕지 않는 이상 아무런 ‘체크 인’ 없이 바다를 접할 만한 시설은 매우 한정적이에요. 현상 설계인 만큼 이를 수치로도 표현해보면 좋겠다며 계산해 보니 그렇게 나왔죠. 마리나에 공공성이 필요한 배경을 나타내는 키워드였어요.
실현되기 전의 건물을 전달하는 방법
박재완
일전에 부산 공동어시장 현상 공모 참여하면서, 부산에서는 조형이 과격한 설계안이 자주 당선된다는 특징을 알게 되었었어요. 지역 설계사로서 협업했던 ING도 ‘형태가 무조건 세야죠!’라고 조언하셨었고요. (웃음) 다만 우리 단지에는 화려한 오페라 하우스가 지어질 예정이고, 팀원간의 논의를 통해 공공성이라는 화두에 다다랐던 만큼 형태적으로 자웅을 겨루고 싶지는 않았어요. ‘오페라 하우스라는 멋진 배우가 무대에서 연기하고 있다면, 마리나는 이를 객석처럼 받아주면 어떨까’라는 아이디어가 나왔고, 이는 테라스 형태를 띤 매스로 발전되었어요. 오브제와 조화를 이루는 모습 그 자체로 상징symbol이 되고자 했던 거예요. 이런 생각들이 다름 아닌 그 아침 회의에서 나온 거예요. (웃음) 길다란 모습을 부각시키는 모형을 만들었던 것도 그러한 조형적 메타포를 일정 부분 상쇄하기 위한 차원이었어요. 현상 설계에서 길이 2m짜리 단면 모형 만들기가 쉽지 않은데, 기룡 님과 영빈 님이 고생 많이 했죠. 중간 설계 때 한 층이 더 높아지게 되어 조금 아쉽지만요.
김기룡
(멋쩍은 웃음) 보조하는 분도 계셨는걸요. 그때는 열심히 만들기도 했지만, 동료들 모두가 정말 순수한 열정을 갖고 몰입해서 일한다는 걸 깊이 느꼈어요. ‘이 일은 진짜 긴장감을 갖고서 나 아닌 타인을 위해 열정적으로 해야 하는구나’, 그런 업의 본질을 많이 생각하게 된 계기였어요. 매일의 업무 수행을 넘어, 우리가 해낸 일이 나중에 어떠한 파급력을 가질 것이며 이를 설득하기 위한 시나리오들까지도요. 당시에는 ‘모르긴 몰라도 무언가 있겠구나’라는 막연한 확신이 있었어요. 돌이켜 봐도 정말 그렇고요.
정주현
질문지에서 ‘실현되기 전 건물을 전달하는 방법’을 물으셨는데, 저희 안을 잘 드러내 줬던 게 그런 모형이었다고 생각해요. 단면 모형과 콘셉트 모형, 그 두 가지요. 현상 설계안 제출 보고서도 마찬가지였어요. 쪽수가 정해져 있었고 흑백으로 제출하라는 작성 조건도 있어서, 어떻게 안을 효과적으로 보여줄지 저희끼리 정말 많이 고민했었어요. 표현기법 측면에서 그래픽 디자인 사례들을 여럿 참고하기도 하고, 쪽수가 모자라면 보고서 간지까지 알차게 사용하는 등으로 아이디어를 낼 수 있었죠.
마치며
오정택
저는 현상 설계 동안의 프로세스가 정말 좋았어요. 재완 님께서 ‘스텝 바이 스텝으로 좋은 것들을 잘 밟아나가보자, 무작정 그리기보다 분석을 하고 나서 그려보자’며 단계별로 명확하게 아이디어를 발전시키는 방법들을 토의하며 진행한 과정이 기억에 남아요. 결과적으로 여유 있게 진행될 수 있었던 현상이었어요.
박재완
DP로서 제가 좋았던 것은, 저 포함해서 우리 팀원 누구 하나 소외되는 사람이 없어서 좋았어요. 누군가가 콘셉트를 주도하고 그에 따라 역할이 나뉘는 일 없이요. 분업은 필요한 게 맞는데, ‘나는? 나는 뭐 아이디어 없는 줄 알아?!’ (일동 웃음) 하고 누군가 쀼루퉁할 일이 없었다는 뜻이에요. 하나의 주제 아래 저마다의 아이디어와 다양한 안들을 나누며, 모두가 주인 의식을 가지고 참여할 수 있었다는 점을 저는 가장 높이 사요. 특히나 현상 설계였던 만큼 더더욱요.
김기룡
얼마 전에 준공 사진을 조금 받아봤는데, 건물이 가진 각각의 면들이 주변에 잘 대응하면서 하나의 풍경에 녹아든 모습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최근 고향에 다녀오면서 한 번 들르고 싶었는데 아직 자잘한 공사 중이어서 가볼 순 없었거든요. 설계한 지 벌써 5년이 지났는데, 그때의 안목과 식견들이 어떤 그림으로 발휘되었을지 궁금해요. 나중에 시간 내서 꼭 다시 방문해보려고요.
정림 피플앤웍스 시리즈 『N.2 부산항 북항 마리나』에서 발췌
천지혜. 2008년 정림건축에 입사했다. 일산 요진 와이시티 복합개발, 리비아 트리폴리 워터프론트 개발, 영종하늘도시 오피스텔 신축설계, 용인 SK아카데미 마스터플랜 및 리모델링에 참여 또는 진행 중이다. 부산항 북항 마리나 현상 설계, 본 설계 용역. 디자인 감리까지 TL(team leader)로 참여했다.
박재완. 프랑스 빠리-벨빌 국립건축학교에서 도시계획과 건축설계를 배우고 2007년 정림건축에 입사했다. 현대해상 하이비전센터, 아모레퍼시픽뷰티 제2사업장, SK기념관 등을 수행했으며 한국건축문화대상 대통령상(2017), 한국건축가협회 BEST 7 협회상(2017) 등을 수상했다. 부산항 북항 마리나 프로젝트에서는 현상 설계부터 현장 디자인 감리에 이르는 전 과정에 참여했으며, DP(design principal)로서 디자인과 기술적인 부분을 주로 담당했다.
정주현. 2017년 정림건축에 입사했다. 대구은행 본점 리모델링, SK기념관, 시화 MTV 수변상업시설, SK실트론 복지동 등의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부산항 북항 마리나 프로젝트 당시 현상 설계 단계에 참여해 계획안 작성 및 보고서 작업, 계류 시설 설계 검토 등을 담당했다.
오정택. 2014년 정림건축에 입사, 부산항 북항 마리나를 비롯해 SK기념관, 삼성전자 메가스토어 대전 본점 등을 수행했다. 부산항 북항 마리나 프로젝트 당시 현상 설계부터 중간 설계 마무리 단계까지 참여했다. 현재 플로르건축사사무소를 운영 중이다.
김기룡. 2018년 정림건축에 입사했다. SK하이닉스 이천 M16 설계용역, 강남역 복합환승센터 연계 공간 설계, SK케미칼 사무동 신축설계, 안면도 꽃지지구 호텔 리조트 개발 사업에 참여했다. 부산항 북항 마리나 현상 설계 제안서의 보고 내용 작성 및 모형 제작을 담당했다.
들어가며
소개 부탁드립니다.
생각공장 신축 프로젝트에서 DP(design principle) 역할을 맡은 18년차 김동관입니다. 창원한마음병원, 워커힐 리버파크, 경기도의료원 안성병원, 신안경찰서 등 다양한 규모에서 여러 용도의 건축물을 설계했습니다. 장소성을 담은 건축을 지향합니다. 주변과 관계를 잘 맺는 건물이라면 오랜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사랑 받으며 그곳에 자리매김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생각공장 프로젝트에서 어떤 역할을 맡았나요?
현상설계공모 때부터 DP로서 프로젝트 디자이너 역할을 했습니다. 매주 클라이언트 협의와 브리핑을 진행했고요.
생각공장 당산의 디자인 요소
지식산업센터라는 유형 특성상 건축가가 디자인적으로 개입할 여지가 적습니다. 이때 정림건축은 ‘디자인’을 어떠한 관점으로 접근했는지 궁금합니다.
지식산업센터는 다층형 집합건축물로 각각의 실을 분양합니다. 그러니 아파트의 주호처럼 규격화한 실을 오차 없이 구현하는 것이 중요하죠. 그 논리에서 설계사무소의 역할은 입주사들이 쾌적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구현하고 지역 주민에게 환대 받는 제안을 만드는 데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희는 저층부에 보다 집중했어요. 사무실로 채워진 상층부는 클라이언트가 사업적으로 판단한 면적과 호수에 따르되, 주민과 입주사들이 다 함께 오가는 저층부는 도시와의 관계를 만들고 이벤트가 벌어지고 사람간의 교류가 일어나는 장을 만들자고 생각했죠. 쉽게 말해 저희는 저층부에서 디자인 승부를 보자고 생각한 셈입니다.
그러한 생각이 선큰 광장으로 드러난 건가요?
시작은 클라이언트의 제안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상가의 분양가는 층수에 크게 영향을 받습니다. 예를 들면 1층 상가의 임대료가 100만원일 때 2층 상가는 50만 원인 식이죠. 그런 이유에서 클라이언트는 1~2층 전체 면적을 상가로 두고 싶다고 말씀하셨고, 이에 저희는 동의하면서 공용 로비를 선큰 광장으로 진입하는 지하 1층에 두자고 제안했습니다. 물론 공용 로비를 지하에 배치한 전례가 없는 지라 계획설계, 실시설계 단계에서 클라이언트의 의구심이 커졌습니다만 이때 저희는 오히려 확신을 갖고 편안하고 쾌적한 지하 공간을 만들기 위해 더 신경 썼던 기억이 납니다.
실은 비화가 하나 있습니다. 건물 배치를 스터디하던 단계의 일인데요. 건물 덩어리들의 규모나 배치 등은 어느 정도 정해진 상태였고, 여기에 설계팀은 ‘도시에 새로운 길을 만들어 사람들을 끌어들여보자’는 아이디어를 모으고 있었죠. (윤)나예 님에게 대지에 들어가는 길을 모형으로 만들어달라고 했는데, 경사로를 만들어 온 거예요. ‘어라, 경사를 두라고 한 적은 없었는데’ 했더니 ‘아, 저는 만드는 줄 알고…. 그런데 이게 더 좋지 않나요? 그 길에 이렇게 경사가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요’ 하면서 이야기가 점차 발전되었어요. 참 우연찮은 일이었죠. 선큰의 가장 최초는 거기서 시작됐습니다.
그랬군요. 지식산업센터의 새로운 유형을 만들고 싶었던 건가요?
우선은 클라이언트와 정림건축 모두 지식산업센터를 효율성, 가성비로만 판단하던 시대가 지났다는 데에 동의했거든요. 그래서 ‘사옥’처럼 만들고자 했습니다. 개별 입주사들에게 자긍심이 될 만한, 오래 머물고 싶은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앞서 말했듯 ‘길’이라는 콘셉트도 이 건물이 자아내는 풍경에 사람들이 자연히 이끌리길 바란 목적에서 비롯되었고요. 그에 걸맞은 건축적 이벤트를 유발할 장치로서 선큰 광장이, 그리고 지상층 상가들 앞에 지그재그로 낸 포켓 공간 등이 설계되었던 것입니다.
더불어, 적재적소에 적당한 투자로 전체 퀄리티를 높이는 데에 집중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투자란 공용 로비에 마련한 라운지, 지상 1층의 바닥 타일과 외장 디자인 블록 등이라 할 수 있겠어요. 기존 지식산업센터에서는 저렴하게, 최소한으로만 구현했던 요소들에 품격을 찾아준 셈이죠. 듀플렉스 타입 호수도 처음 예상한 개수보다 늘리자고 해 고객의 선택지를 더 만들었습니다. 이건 모델하우스를 짓기 전에 90% 분양 완료를 기록했다고 들었습니다.
도시를 마주하는 태도
입면 디자인에서는 어떤 태도를 취했나요?
일명 “wet & dry”라는 디자인 콘셉트를 취했는데요. 1층부터 4층까지는 디자인 블록이라는 콘크리트 벽돌을 치장쌓기하면서 수평선이 강조되는 디자인으로, 5층부터 시작되는 상층부 업무시설은 컬러 로이 실버유리와 간결한 루버 디자인으로 단순하게 마감했습니다. 이미 번잡한 도심 풍경에 또 다른 얼굴을 내밀고 싶지 않았습니다. 대신 지하 1층은 로비와 상가인 1~2층, 지식산업센터를 지원하는 업무시설인 3~4층은 투명 로이 유리와 다른 루버 간격으로 구분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혹 이곳을 유심히 관찰하셨다면, 기부채납시설인 어린이 도서관 입면에도 동일한 마감재가 사용된 것을 발견하셨을 겁니다. 도서관이자 복지시설로서 필요한 차폐와 개방성을 각 면에 따라 적절히 채택하면서, 생각공장과 같은 대지에 놓여 연속성을 지닌 건물임을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생각공장은 연면적 10만㎡에 가까운 규모인 만큼, 이 당산동 도심에 어떻게 들어서게 할지 그리고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도 고민이 되셨을 듯합니다.
맞습니다. 길 건너 인접한 아파트들과 비슷한 높이의 15층 건물이고, 휴먼 스케일에 비하면 아무래도 물리적으로 압도될 만한 규모니까요. 설계에 참고했던 레퍼런스들 가운데 용산 아모레 퍼시픽 본사 사옥이 있었는데, 그와 같이 당산동 일대를 산책하면서 언뜻언뜻 비치는 정도로 눈에 띄었으면 했습니다. 입면 디자인에서 말씀드렸듯 개성을 크게 드러내지 않는 깨끗한 얼굴로 충분하다고 생각했고요.
부지 외곽 가까이에 건물들을 두어 채광이나 환기가 원활하도록 했고, 건물 중간중간 보이드를 냈어요. 건물을 뚫어놓은 듯한 이 빈 공간들 사이로 우리의 시야도 막힘없이 가로질러 나아갑니다. 어디에서 관찰하느냐에 따라 보이드의 크기도, 당산동이 바라다보이는 장면도 다 달라지죠. 더불어 보이드가 생겨난 자리마다 외부 테라스 공간까지 함께 조성해낼 수 있었고요. 도시와 건축에서 일어나는 시각적인 흐름과 동선을 존중하면서도 새로이 유도하는, ‘메가 스케일의 건물로서 지녀야 할 자세란 이래야 하지 않을까’ 하며 고민했던 설계였습니다.
현상설계 당선안과 다르게 구현된 점이 있다면 어디인가요? 그 이유도 궁금합니다.
대지를 가로지르는 길은 생각공장 프로젝트의 시작이자 끝으로서 일관되게 유지되었습니다만, 지하 1층에 공용 로비를 두며 길과 로비가 만나는 교차점이 생겼지요. 엘리베이터 코어와 중간설계가 변경이 됐고요. 대지를 관통하는 선큰이란 개념은 약해졌지만 건축물의 기능성과 로비 인지성은 높아졌다고 생각합니다.
팀으로 설계하기
DP로서 팀원과의 소통을 할 때 신경 썼던 점이 궁금합니다.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한 태도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저희는 매주 수요일 판교에서 클라이언트와 주간회의가 있었는데요. 사무실로 복귀하는 버스 안에서 저는 그날 회의에 나왔던 아이디어를 정리하고 계획안에 반영해,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팀원들과 공유하려 했습니다. 만일 제가 사무실에 도착하고서 일을 시작하면 팀원들은 제 손만 바라보며 시간을 허비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매사에 제 역할을 신속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팀원들 역시 각자의 자리에서 그런 마음으로 프로젝트에 임했고요. 그 덕분인지 건축 심의, 허가 등 행정절차도 막힘 없이 술술 진행됐습니다. 보통 건축 심의 때 지적을 많이 받는데요, 저희는 “저대로만 지어달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정말 뿌듯했죠.
마지막으로 소회를 들려주세요.
2018년 추웠던 12월, 팀원들과 첫 현장답사 때 보았던 높은 담장과 적막했던 대지가 이제는 분주한 입주자들로 새로운 활기를 띠고 있는 모습이 신기합니다. 프로젝트는 이 장소에 들어서는 대규모 건축물이 가져야 할 자세와 주변 주거시설에 필요한 것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에 저희는 도시의 길을 대지로 끌어들여 주변 도시와 이웃이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을 그렸죠. 일단 그 뜻이 성공적으로 구현된 만큼 앞으로의 사용기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앞으로 생각공장이 도시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공간이자 길이 되길 바랍니다.
한편 3만 평이라는 대규모 프로젝트를 아이디어 제안부터 준공까지 잘 마무리 할 수 있어 기쁩니다. 사실 정림건축 같은 대형 건축설계사무소에서 개인이 이렇게 현상설계공모부터 준공까지 경험할 기회가 드뭅니다. 드러나지 않았지만 프로젝트를 위해 정림건축 내부적으로도 지원해준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적은 인원으로 시작해 클라이언트 TF팀과의 주간회의를 일 년이나 이어가면서 양측이 만족하는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는 점에서 함께 해준 우리 팀원들이 자랑스럽고 또 고맙습니다.
정림 피플앤웍스 시리즈 『N.1 생각공장』에서 발췌
김동관. 국민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건축설계를 전공했다. 2006년에 정림건축에 입사하여, 설계1그룹 선임TL을 맡아 근무했고, 현재(2025) 첨단설계부문 디자인 SU 리더로 재직 중이다. 대표작으로는 생각공장 당산, 창원한마음병원(2021 창원시 건축대상 대상), 경기도의료원 안성병원(2019 경기도 건축문화상 은상), 워커힐 리버파크 실내수영장, 고려대학교 첨단융복합의료센터, 신안경찰서 등이 있다.
설계팀 대담에 앞서
생각공장 당산은 현상설계공모부터 준공까지 한 팀으로 작업했던 이례적인 사례다. 프로젝트는 구성원 모두가 시작부터 끝까지 온전히 같은 목표를 향해 노력할 수 있는 프로젝트로 운영되었고, 구성원들은 각자 맡은 일이 뚜렷하면서도 팀으로서 시너지를 내기 위한 다양한 활동과 고민을 멈추지 않았다. 팀원 개개인은 아직 불완전한 건축가일지라도, 팀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각자가 자신의 역할을 100% 이상 수행한다면 더욱 값진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참석. 강석규, 김동관, 김정연, 오성종, 윤나예
진행. 박민호, 오가영
정리. 윤솔희
기억에 남는 순간
김동관
당산동 생각공장(이하 생각공장) 설계안을 작성하기까지 매주 클라이언트와 회의하고 안을 디벨롭했던 때가 생각납니다. 현상설계공모에 제안서를 낼 때, 설계도서를 납품할 때, 그리고 착공에 들어갈 때 매번 또 다른 힘듦이 시작되었던 것 같아요. 그럼에도 그 여정을 옆에서 함께 겪어나가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 정말 큰 힘이 되었습니다. 돌아보면 쉽지 않은 프로젝트였습니다. 분양 건물이라 예정 공사기간이 빠듯했고 프로젝트 규모에 비해 팀원이 많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지식산업센터라는 유형을 팀원 모두가 처음 접했던 와중에 그 유형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지하 선큰 광장이라는 실험에 도전했던 거예요. 팀원 각자가 자신의 역할을 다 해내지 못했다면 오늘의 모습을 보기 어려웠을 겁니다.
오성종
체력적으로 힘든 시간이었던 건 분명하지만 이렇게 무사히 준공 모습을 볼 수 있어 만족해요. 당시 4년차였던 (김)정연 님이 구조 도면을 단독으로 맡아 모두 작성했던 게 기억납니다. 처음에 잘해낼 수 있을지 옆에서 걱정도 많이 했는데, 정말 놀랐어요. 저연차에 선큰 광장 구조를 이해하며 전문가 수준의 도면을 작성해낸다는 건 제가 봐도 쉽지 않은 일이었거든요. 성명준 소장님과 협업하며 완성도를 높여 간 프로페셔널함에 감동했습니다.
김정연
구조 도면을 그릴 때는 어렵다, 아쉽다 그런 감상을 느낄 겨를도 없었던 것 같아요. (웃음) 현장 감리(CM) 역시 정림건축에서 맡아서 매 시기에 현장 사진을 받아볼 수 있었는데요. 한 층 한 층 올라가는 광경을 보며 ‘잘 지어지고 있구나’ 안도했던 순간이 떠올라요. (윤)나예 님은 어떠세요? 기억 나는 순간이 있어요?
윤나예
당산동 생각공장 프로젝트는 정림건축에 신입으로 입사해 맡은 첫 프로젝트였어요. 저는 특히 모형 제작을 담당했는데 지금 돌이켜봐도 얼마나 쉴 새 없이 많이 만들었던지, 프로젝트가 끝난 이후로 한동안 모형 만들기를 외면할 정도였습니다. (웃음) 전체적으로는 다른 팀원들을 서포트하는 역할이었는데 한편으로는 아쉽기도 해요. 이 프로젝트에 밀착해 기여하는 바가 부족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김동관
아뇨, 절대 그렇지 않았어요. 일례를 말해 볼게요. 생각공장 선큰 광장의 가로 폭이 18m인 것 모두 기억하시죠. 설계할 때 과연 이 정도 폭이 적정할지 확신하기 쉽지 않았어요. 스케치업 렌더링을 참고한다 해도 이는 오감이 아닌 시각에 의한 판단이 될 테니 계속 의심할 수밖에 없었죠. 이때 나예 님이 만들어준 모형들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데요. 모형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도시적 맥락에 순응하는 규모, 아름다운 비례, 실용적인 가능성 등을 발견한 것이지요. 저는 나예 님이 만들었던 단면 모형을 아직도 가지고 있어요. 그 모형 하나가 이 프로젝트를 다 설명해주거든요. 물론 신입사원으로서 여러 일을 조망하고 싶었을 것 같아요. 모형 제작뿐만 아니라 디자인, 디테일 연구 등의 역할을 아우르며 프로젝트를 배워가는 것은 아틀리에 운영방식에 가깝다면, 한 단계씩 업무 범위를 넓혀가는 정림건축의 방식은 전문성의 깊이를 더하기에 효과적이라고 생각해요.
강석규
이 프로젝트에서는 각자가 맡은 역할이 뚜렷했어요. 저는 입면도, 부분상세도 작성을 비롯해 도시계획시설을 담당했고 정연 님은 구조도, (오)성종 님은 평면도, 나예 님은 모형 제작, 보고서 작성 등을 맡아 모두가 마치 톱니바퀴처럼 움직였죠. 한 명이라도 아프면 큰일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빈 틈이 없었는데, 사실 이건 팀 운영 차원에서는 위험 요소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선큰 광장
김동관
맞아요. 강력한 팀워크는 시너지 효과를 내는 동시에 갈등에 취약할 때도 있거든요. 한 개동과 두 개동에 로비를 각각 두었던 안에서, 3개 동 전체를 위한 공용 로비를 선큰 광장에 두는 안으로 넘어가던 때에는 이견이 부딪히면서 가장 큰 위기가 왔던 시기예요. 클라이언트가 요청한 공용 로비란 건물을 방문하는 누구에게나 입주 업체가 “메인 로비로 오세요”라며 가리켜 소개할 수 있는 공간을 의미했어요. 팀원들은 그 메인 로비의 위치와 이유에 의문이 있었고, 사무실 분위기는 한동안 냉기가 감돌 정도로 싸늘했어요. 그 사이에서 절충점을 찾고 양측을 설득하는 게 제 역할이었는데 그 갈등을 해결할 실마리도 결국 디자인이었어요. 디자인 디벨롭(DD) 이후 이 냉랭한 긴장 상태는 한층 완화될 수 있었죠. 모두가 설계안에 대한 여러 의견과 제안을 경청하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클라이언트의 요청에 내포된 의미, 이 건물의 역할과 기능 등을 복합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오성종
현상설계공모 심사 당시 심사위원들 사이의 가장 큰 논쟁거리가 선큰 광장이었고, 정림건축의 설계안을 뽑은 이유 역시 선큰 광장이었다는 말이 기억나요. 경제성, 효율성만 쫓는 지식산업센터에서 이러한 디자인적 도전이 과연 유의미한지 아무래도 다들 고민했던 것 같아요. 선큰 광장이 그만큼 도시에 강력하게 말을 거는 파격적인 건축 어휘였던 건 분명해요.
강석규
결국 마지막에 TF팀과 임원 등 관계자들이 모여서 선큰 광장을 존치할지 말지 투표했었잖아요. 그때 유지하자는 의견이 과반수를 살짝 넘었던 것 같아요. 특히 젊은 분들이 좋아해주셨고요. (웃음) 당시 결정권을 가진 상무님이 저희 손을 들어주신 점도 컸지만요. 저는 사실 선큰 광장에 공용 로비를 삽입할 때만 해도 반신반의하던 입장이었어요. 모형과 렌더링을 보고 이야기를 거듭 나누며 공용 로비가 있는 디자인의 장점을 발견하기 시작한 것 같아요.
김동관
갑자기 생각났는데 건축 심의할 때 말이에요. 원래 설계사에서 한 명만 오라고 했는데 긴장되고 간절한 마음에 제가 (성)명준 님을 따라 들어갔어요. 심의위원들 앞에서 명준 님의 5분 발표가 있은 다음, 계획되지도 않은 시간을 비집고 끼어들어가 렌더링 영상과 CG 등을 보여주며 프레젠테이션을 이어갔단 말이죠. 그때 심의위원분들이 “저렇게만(계획안처럼만) 지어달라”라고 말씀해주셨어요. 시선 간섭 필름지만 잘 붙여두라면서요. 그때 우리 팀원들이 정말 자랑스러웠어요. 심의도 물론 무리 없이 단번에 통과했고요.
회의와 소통, 완성에 이르는 과정
오성종
건축 심의뿐만 아니라 그다음, 다다음 절차까지도 물흐르듯 흘렀잖아요. 클라이언트 사에서 저희랑 소통하던 설계 파트 담당자 분 말씀이 ‘모든 과정에서 이렇게 제동 없이 한 번에 간 적이 처음이었다고, 너무 좋았다’고 소회를 몇 번이고 밝혀주실 정도였어요. 일정 관리 면에서도 주간회의를 기준으로 일주일 루틴이 있었잖아요. 매주 수요일 주간회의를 마치고 칼퇴한 뒤 목, 금, 월요일은 야근하고, 회의 전날인 화요일은 상황에 따라 야근하면서요. 주말 출근 없이 주중에 열심히 일했던 것 같아요.
김동관
클라이언트인 SK D&D, 콘셉트사인 매니페스토와 매주 주간회의를 하니 얼마나 많은 안건과 제안, 수정과 결정이 있었겠어요. 이때 우리의 전략은 한마디로 ‘여러분이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수준의 프레젠테이션을 계속 보여주겠다’였어요. 정림건축의 전문성을 토대로 신뢰를 높이겠다는 의도였죠. 회의마다 그간의 사항을 업데이트하고 최대한 우리 관점과 목소리를 입혀 한 단계 높은 제안을 보여줬던 게 긍정적으로 작용했던 것 같아요.
오성종
저는 착공 이후부터 TL 역할을 맡게 되면서 현장과의 커뮤니케이션도 담당했는데, 클라이언트와 주고받은 메일들을 세어보니 1500통이 넘어가더라고요. 일주일에 거의 30통씩 쓴 셈이에요. 그렇게 촉박하게 진행되었던 과정 속에서 힘이 되었던 건 역시 팀원 모두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서포트해줬다는 점이에요. 정말 고마워요. 참, TL로서 좋았던 점이 또 하나가 매주 공사 현황 사진을 제일 먼저 받아서 단톡방에 함께 공유할 수 있었던 것이에요.
김동관
성종 님이 현장의 변화를 매번 신속하고 정확하게 팔로우업하지 않았다면 준공 모습도 많이 달라졌을 거예요. 보기에 두드러지지 않을지 몰라도 지식산업센터 유형에서 보지 못했던 도전이 많이 있거든요. 1층 바닥의 인조 대리석, 외장재인 벽돌, 유리, 루버, 난간 등의 사양, 색, 치수까지 무엇 하나 허투루 선택한 게 없어요. 이게 왜 중요하냐면 저층부 선큰 광장과 지하 1층의 공용 로비, 지상 1-2층의 상가가 곧 이 건물의 아이덴티티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도시와 관계 맺는 방식, 시민을 환대하는 태도, 생각공장 사용자를 위하는 배려가 이곳에 있어요. 그것도 클라이언트의 경제적인 지표를 동시에 충족하면서요. 디자인위원 답사를 갔을 때, 기현철 님의 첫 마디가 바로 “도시가 바뀌었네” 였어요. 이 얼마나 우리가 바라던 바인가요. 2018년 겨울 첫 답사에 느꼈던 동네 분위기를 떠올려 보세요. 높다란 담이 버티고 서 있던 골목이 휑하고 삭막했잖아요. 이제는 이 일대의 분위기가 바뀌었어요. 도시계획시설까지 있어 유용하고 소중한 시민 공간이 되었죠.
앞으로 생각공장 당산은
윤나예
2022년 가을 입주를 시작했으니 앞으로 사용자들이 상주하는 시간이 이곳에 쌓일 텐데요. 저희 계획대로 잘 사용된다면 정말 좋겠어요.
오성종
SK D&D가 몇 년 간 관리한다고 들었어요. 관리주체가 있으니까 사용자들 간의 질서와 규칙도 뿌리내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선큰 광장으로 사람을 끌어 모아 이용을 활성화하려던 생각이 도시의 공공성으로 확장되어 더욱 의미 있는 프로젝트였습니다.
김정연
제 기억에 처음 이곳 부지는 문래역, 영등포구청역과도 거리가 조금 있는 편이었고 인근에 아파트 단지와 학교가 있음에도 환경이 쾌적하지만은 않았어요. 이제 정돈된 유리 커튼월 건물과 모두의 마당으로 열린 선큰 광장으로 다시 탄생했으니 정말 일대 풍경이 달라질 것 같아요. 앞으로 펼쳐질 모습이 기대됩니다.
강석규
저도 이곳이 도심 속 작은 벤치 같은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지그재그로 난 1층 상가 테라스에 사람들이 머물다가 가고, 선큰 광장에 다양한 이벤트가 열리는 모습을 상상해요. 비워 둔 만큼 새로운 이야기로 가득 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김동관
준공 이후에 이렇게 소회를 나누고 피드백을 할 자리가 있어 참 좋습니다. 준공 프로젝트를 몇 개 경험해보니 프로젝트를 마치고 난 팀원들이 뿔뿔이 흩어져 홀로 남았을 때가 제일 우울하더라고요. (웃음) 2023년 여름 즈음 화창한 어느 날에 당산동에서 같이 점심 먹고 커피 한 잔 할까요? 사용자들이 어떻게 공간을 쓰는지도 보고요.